▲레미 할머니의 서랍
문학과 지성사
그림책을 함께 읽고 난 후 한 분이 말씀하셨다. 미니멀리즘이 강조되는 세상에 자신은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고. 그런데 이 그림책을 읽고 나니 '버리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위로가 된다'고. 어디 그 분뿐일까?
버린다 버린다 해도, 살아온 이력만큼의 물건들을 우리는 짊어지고 산다. 젊은 분들은 엄마, 친정아버지, 시어머니가 떠오른다고도 하셨다. 무엇이든 새롭게 재탄생시키는 레미 할머니의 손이 사소한 물건으로 재치 있는 소품을 만들어 내는 올케를 떠올리게 한다는 분도 계셨다.
할머니는 털실 뭉치로 할아버지의 털모자를 떠드렸고, 빨간 모자를 쓴 할아버지는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할머니를 찾는다. 작은 갈색 상자와 함께. '네, 함께 살면 즐겁겠는걸요.'
'함께 하면 즐겁겠다' 이보다 멋진 동반의 이유가 있을까? 서랍장 속의 물건들도 재탄생했지만 할머니 역시 인생 2막을 맞이하셨다. 그런데 그 인생 2막은 그냥 온 것이 아니다. 눈밝은 독자가 발견했듯이 그림책의 속표지에서 할머니는 벌써 '뜨개질'(?)을 하고 계셨다.
할아버지네 고양이로 일찌감치 찜해놓으셨고. '혜안'의 독자는 할머니의 빨간 스웨터와 할아버지의 빨간 털모자에서 '운명의 붉은 실'을 찾아내기도 하셨다. 할아버지가 할머니께 드린 빨간 꽃도 놓칠 수 없다. '빨간 양귀비꽃'의 꽃말은 '위안, 위로, 그리고 사랑의 예감'이란다. 마쉬 책방지기님을 비롯한 발 빠른 독자님들의 리서치가 그림책 이해의 공간을 확장한다.
할머니의 빨간 스웨터와 할아버지의 빨간 털모자만 커플이 아니다. 딸기잼을 만들 때, 피클을 담을 때, 그리고 아기 고양이를 안을 때 할머니의 패션이 무엇과 커플템이 되는지 찾는 재미처럼 <레미 할머니의 서랍>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초콜릿을 담았던 빈 상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가장 로맨틱한 가교 역할을 하게 된다. 나도 쓸모가 있을까 하고 조바심을 내고 기다리던 그 시간에 대한 가장 환타스틱한 보답이다. 빈 초콜릿 상자처럼, 빈 병도, 쓰고 남은 노란 리본도, 자투리 털실 뭉치도 저마다 새로운 인생 2막을 연다.
그리고 그들로 덜그럭거렸던 서랍장은 비었다. 할머니는 이제 다시 그곳을 또 다른 이들로 채워갈 것이다. 자식이 떠나고 홀로 남은 할머니의 삶도 함께해서 즐거울 할아버지로 즐거울 것이다. 비우고 다시 채워짐, 바로 그것이 'c'est la vie', 노자님 말씀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우리 인생의 많은 시간은 한 해를 보낸 할머니처럼, 그리고 서랍장 속 초콜릿 상자처럼 '채워짐'을 마련하고 기다리는 시간으로 '채워질' 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그림'으로 가득 찬 그림책이 선사해준 삶에 대한 진득한 혜안이다.
레미 할머니의 서랍
사이토 린, 우키마루 (지은이), 구라하시 레이 (그림), 고향옥 (옮긴이),
문학과지성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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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리즘 유행 속 물건 못 버리는 사람 위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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