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 '내겐 너무 소중한 그녀' 방송 장면춤의학교(대표 최보결) 벗들과 '러브 앤 피스'라는 주제로 광주에서 춤을 추는 모습이 방송에 나갔다
곽승희
6월 중순 촬영이 확정된 후 제작진은 약 3주 정도 나의 일상을 관찰했다. 나를 포함해 말을 할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동반자 '한몬'과 춤 공동체 '춤의학교 벗들', 부모님, 친구들, 은사님께 내 삶이 어때 보이는지 물었다.
제작진의 질문은 내 주변 이들에게 또 다른 씨앗으로 연결됐다. 평소 피상적으로 에둘러 말하거나, 생각만 하던 부분이 언어로 구체화됐다. 자연스럽게 나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생각을 전하기도, 함께 특별한 이벤트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아버지와 굉장히 오랜만에, 적어도 십 년은 훌쩍 넘는 시간 만에, 바둑을 두었다. 어릴 적 나를 바둑학원에 보내던 추억을 제작진과 나누던 부모님, 오랜만에 그 시절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하셨다.
사실 나는 이런 상황 자체가 어색했다. 무언가를 얻고 싶어서 꽤 긴 시간, 적어도 몇 년 정도 투여해본 이들은 이해할 것이다. 갖고 싶은 대상에 애정과 증오를 동시에 느낄 수 있음을. 나의 경우 바둑이다.
꼬꼬마 시절 바둑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했다. 그런데 무언가를 잘한다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재능을 보여 주목을 받고, 주목을 받아 전문 교육을 받다보니 욕심이 생겼다, 승리에. 언제부턴가 바둑이 즐겁지 않아졌다.
또한 사랑은 타이밍임을 아는 이들은 이해할 것이다. 한 때는 그토록 받고 싶었던, 사랑하던 사람의 관심도 때가 지난 후라면 다시 마음을 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둑을 다 끝내고 나니, 바둑과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마음이 후련해졌다. 서로를 적으로 전제한 바둑 한 판이 끝났다. 바둑돌을 치우니, 그 아래 깔려있던 비어있는 바둑판이 드러났다.
돌이 사라진 바둑판이, 다시 살 기회를 잡은 내 인생 같았다. 한 판이 끝났다면 다른 한 판을 두면 될 일이다. 언제까지 이전 판의 아쉬움에 사로 잡혀 있을 건가. 한때는 내 세상을 힘들게 만든 애증의 대상도 사랑의 타이밍도, 뭣이 중헌디, 싶다.
바둑의 본질보다 바둑의 승리에 집착했기에 애증을 품었던 것 같다. 함께 산책하며 두런두런 얘기 나누는 부녀의 이미지를 원했던 청소년 시절은 이미 한참 전에 끝났는데, 여태껏 꽁해있었던 것 같다.
인생도 바둑처럼 매 한 판 최선 다해 두고, 끝난 후 아쉬움도 기쁨도 바둑돌에 묻어 담으면 될 일인데. 다시 바둑을 둘 수 있으나 집착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이걸 이제야 알았다니.
그제야 대본 없이 나의 일상을 따라다니는 제작진의 의도가 확실히 이해됐다. 이들의 휴먼 다큐는 주인공이 전하고 싶은 특정한 모습이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장르가 아니었다. 주인공이 일상을 살아가며 느끼는 것들을 생생하게 담는 게 중요했다. 그렇기에 주인공과 연결된 이들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이제 내가 카메라에 담기는 것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카메라에 담긴다는 게 뿌듯해졌다. 세상을 향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을, 지향하는 삶의 태도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