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과 영상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곳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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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가 대중적이지 않던 시절, 포털이 메인 화면에서 뉴스 편집권 전부를 갖고 있던 시절, 나는 글과 영상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곳에 입사했다. 당시 정부와 여당 정치인들의 언행을 모으는 일이 주된 역할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특정 정치인과 정당에 특히 비판적인 글과 영상의 전달자가 되어 버렸다.
비판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비판의 이유를 잊은 채 비판하는 건 아닌지 알아차리는 일은 비판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비판을 하는 건 내 오른발을 밟은 타인이 내 왼발마저 짓밟는 일을 막기 위해다.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비판하는 것이다. 사과받아 용서하고 털어내어 가벼워지기 위해서다. 상대와 악연으로 서로를 붙들고 있는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우리 모두 자유롭고 행복해지기 위해 비판하는 것이다.
상대를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기 위해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내 오른발을 밟은 후 내 왼발에 걸려 넘어지면 그 등판을 짓밟기 위해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짓밟혔어도, 내가 짓밟으면 그때부턴 순서가 상관없다. 나에게 상대는, 상대에게 나는 천인공노할 악행의 당사자가 될 뿐이다. 같이 망할 뿐이다.
처음엔 누구나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비판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글과 영상이 올라간 포털 메인 화면에 댓글로 화답해주는 수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기억난다. 그러다 우쭐해진다. 비판과 비아냥, 조롱하는 마음이 동반한다. 이제 비판을 더 잘하고 싶어진다. 상대가 바뀔 줄 모르는, 바꿀 수 없는 존재라고 설정해버리며 마음은 편하다.
비판의 대상자는 영원히 영영 소통할 수 없는 악마 같은 존재로 업그레이드된다. 이제 힘들게 초심을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안 변할 건데. 어차피 상대는 악마일 뿐인데. 그 아래에서 호가호위하려는 무능력한 정치꾼들인데, 이들을 지지하는 당최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인데.
비판 대상이 인간의 범위를 넘어서 악마화 되어버리면 이제 남은 일은 공격력을 가다듬는 것일 뿐. 상대는 적이고, 우리는 아군이다. 상대에 대한 연민을 잃어간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한 태도가 반사될 수 있음을 그때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세상에 필요한 비판에 일조했다고 보람찼던 것 같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점점 초심을 잃었던 게 아니었을까.
상대를 이 세상에서 추방해도 정당한 악마로 상정한 내 마음이, 글과 영상에 보이지 않은 꼬리표처럼 달려서 온라인에서 널리 널리 퍼진 게 아니었을까. 대통령이 탄핵되고, 정권이 바뀌고, 다시 또 새로운 대통령이 나타났지만 정치인을 비판하는 우리의 모습은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마치 서로가 서로의 거울인 것처럼 똑같은 분노를 갖고 상대를 미워한다.
그때 공격하던 사람들은 지금 수비를 하고, 수비하던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공격 중이다. 연민이 메마른 관계에 나 역시 접착제를 한 방울 정도 보탰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서로의 삶을 구성하는 존재라면, 우리의 말과 글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지금 이 우리가 놓아버린 연민을 다시 기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물론 비판 대상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 암 환자로서 십분 이해한다. 정말로 내 삶을 갉아먹는 암이라면 떼어낼 수 있을 때 떼어내야 한다. 하지만 대가를 치러야 한다. 미움과 분노 에너지는 파괴력이 어마어마하다.
적은 곧 나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