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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삽니다, 힌남노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육지와 전혀 다른 공포...아이 둘과 꼼짝없이 갇힌 이틀, 모두가 무사하길

등록 2022.09.05 09:36수정 2022.09.05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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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온다. 남쪽 망망대해에서 몸집을 불린 태풍 힌남노가 서서히 제주도로 다가오고 있다. 태풍이 오는 게 마치 거짓말이라는 듯 4일 제주 동쪽 아침은 유독 해가 쨍하고 한여름날처럼 무더웠다. 동네 삼춘(제주어로 이웃집 어른을 이르는 말)들은 큰 태풍일수록 오기 전에 조용하다고들 한다. 고요할수록 잔잔할수록 긴장은 배가 된다.


3일 오후부터 집 주변에 날아갈 만한 것들을 정리했다. 외부 의자나 테이블은 모두 눕혀 놓고 날아갈 만한 물건들은 집이나 창고로 들였다. 할 만큼 했는데도 불안한 마음에 어제 아침 다시 집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내부로 더 들여야 할 것은 없는지, 더 손봐야 할 곳은 없는지 살피고 또 살핀다.

살피고 또 살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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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힌남노가 한반도를 향해 북상 중인 4일 제주도 서귀포 해안에 파도가 치고있다. 기상청은 4일부터 6일까지 제주에 100∼600㎜ 이상의 비가 더 내리겠다고 예보했다. ⓒ 연합뉴스

 
첫째 아이 학교는 태풍이 섬에 가장 근접하는 이틀 동안 재량휴업을 하기로 했다. 둘째 아이도 어린이집 등원은 불가능한 상황. 아이들과 이틀을 꼼짝없이 집 안에 있어야 한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답답함이 밀려온다. 슬기롭게 잘 지내야 할텐데.

큰 태풍이 오면 꼭 미리 해두는 일들이 있다. 핸드폰을 포함한 각종 전자제품 충전과 마실 물, 씻을 물 받아두기. 초와 손전등 챙겨두기. 아이스팩을 모두 얼려 냉장고에 넣어두기. 오랜 시간 세찬 바람에 흔들린 전깃줄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면 전기와 통신은 단절된다. 심할 땐 수도마저 끊긴다.

TV도 라디오도 핸드폰도 모두 먹통이 되면 태풍이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지,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밖에서 끊임없이 무언가 무너지고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지만 차마 나가서 확인할 수도 없다.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불안은 정점을 달해가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시간들을 보내야만 하는 것.

태풍의 세기도 중요하지만 지나는 속도가 더 중요한 건 이 때문이다. 시간은 참으로 더디게 흐른다. 속도가 느린 태풍이 지날 때면 멘탈을 제대로 붙잡고 있기가 힘들다. 소주라도 한 잔 마시고 모든 걸 잊은 채 쓰러져 자고 싶지만, 해맑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는 데다 혹시라도 위험 상황에 처해 대피해야 할 수도 있으니 그마저도 선택할 수 없다. 맨 정신으로 지난한 시간을 온 몸으로 견딜 때마다 밥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고 몸은 가늘게 떨린다.


태풍이 모두 지나가고 마침내 집 밖으로 나가면 세상은 폭격을 맞은 듯 어지럽다.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는 온갖 나뭇가지와 이파리, 쓰레기들이 마당에 널려있고, 신호등을 비롯한 각종 표지판들은 꺾이거나 뽑혀 있다.

집 몇 채의 지붕은 아예 날아가거나 지붕재가 뜯겨있고, 여기저기 돌담이 무너지거나 건물 외장재가 떨어져 있다. 참혹한 현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마주하는 일몰은 유독 아름답다. 그렇게 자연은 하루 만에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쏟아낸다.

불안한데 왜 제주에 사냐고 묻는다면

그런데도 왜 섬에 사느냐고 누군가 물을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처참한 자연재해가 매년 들이닥치는 걸 알면서도 왜 여기에 보금자리를 지었느냐고 나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도 있다.

이주 초창기에는 매년 다가오는 태풍에 기겁해 섬을 떠나고만 싶었다. 머문 지 만 9년이 된 지금은 그럼에도 이곳을 지키고 싶다. 이방인이었던 나를 감싸주고 사랑스런 아이들이 태어난 곳. 매서운 바람이 불 때도 있지만, 포근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더 자주 누릴 수 있는 곳. 그게 바로 이 섬이기에.

그러고보면 땅과 사람도 궁합이 있는 것 같다. 여행을 다니다보면 어떤 곳은 아무리 처음이어도 도착부터 마음이 평온해지는 반면, 어떤 곳은 아무리 오래 머물러도 정이 가지 않는다. 땅이 사람을 지키는 걸까, 사람이 땅을 지키는 걸까. 섬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 지난 몇 년 간 이곳을 떠난 이들도 많지만, 간혹 다시 돌아오는 이들도 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곳에 머물게 하는 걸까.

진인사대천명,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서 하늘의 뜻을 기다림을 뜻하는 말. 그 시간이 왔다. 예전에는 지붕이 날아가지 않기만을 바랐는데 이제는 지붕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한다. 다만 날아가더라도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는 않기를, 누군가의 소중한 재산을 침해하지는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모든 이웃의 안녕을 간절히 기원한다. 그렇게 길고 긴 이틀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제주도 #힌남노 #자연재해 #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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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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