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륜당 앞에는 바위가 하나 놓여 있다. ‘성생대’라고 한다. 석전대제 등 제향 때 제수 음식과 제물을 검수하는 곳이다. 앞에 보이는 건물은 양반의 자재들이 썼던 기숙사 동재다
임영열
전액 국비로 운영했기 때문에 입학만 하면 무료로 공부하며 기숙사 생활도 할 수 있었다. 병역도 면제받았다. 조선 후기에는 향교가 군역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교과 과정을 보면 유교의 기본 이념인 '소학(小學)'을 마친 후에 유교의 경전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등의 '사서(四書)'와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 '오경(五經)'을 배웠다.
향교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소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고 합격하면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가 되어 지방의 하급관리가 되거나 한양의 성균관에 입학해 문과시험을 거쳐 중앙정치에 진출할 수 있었다.

▲ 문회재. 과거 1차 시험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다
임영열
지방 향교를 졸업한 수재들은 한양의 성균관으로 모여들었다. 조선 중기 호남을 대표하는 선비 제봉 고경명,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금호 임형수 등 이들 역시 모두 성균관 출신들이다. 지금으로 보면 국립 서울대학교 동문들이다.
모두들 말에서 내리시오
관학 교육기관인 향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공부하는 '강학 공간'과 성현들의 제사를 지내는 '제향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주향교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학교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지금은 제향의 기능과 시민들을 위한 인문학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비록 학교로서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광주향교는 동학농민운동 이후 제일 먼저 불의에 맞서 항일 의병을 일으켰다. 장성 출신 기우만(1846~1916) 의병장을 중심으로 수백 명의 유생들이 광주향교를 본부로 삼고 결사 항전했다. 광주공원에는 향교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 순국한 의병장 심남일의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 내삼문. 강학의 공간과 제향의 공간을 나누는 문이다
임영열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광주의 국립 중·고등학교는 어떻게 생겼고 어떤 시설들이 있을까. 향교는 서원과 달리 국가에서 세운 국립 교육기관이기 때문에 전국의 어느 향교나 거의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다만 뱡향과 지형에 따라 공간의 구성이 달라진다.
평지에 세워진 향교라면 전면에 제향의 공간을 두고 후면에 강학 공간을 두는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 형태를 취한다. 경사진 터일 경우 높은 뒤쪽에 제향 공간을 두고 낮은 앞쪽에 강학의 공간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형태를 취한다. 이는 강학의 공간보다 제향의 공간에 더 높은 위상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경사진 곳에 세워진 광주향교는 전학후묘의 공간 구성이다.
향교 정문 앞에 서면 맨 먼저 '하마비(下馬碑)'를 마주한다. 하마비는 이곳이 공자님을 비롯한 성현들이 계신 신성한 곳이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고 걸어 들어오라는 의미다. 하마비 옆에는 향교의 건립과 중수를 기념하는 비석을 모아놓은 비각이 있다.

▲ 대성전. 공자님의 궁전이라는 뜻으로 문묘라고도 한다. 공자를 비롯한 5성과 숭조 2현, 우리나라 18분의 성현 등 25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임영열

▲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5 성과 송조 2현, 우리나라 성현 18분 등 총 25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임영열
외삼문을 들어서면 교육 기능을 담당하는 강학의 공간이다. 학생들의 교실에 해당하는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인간 세상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의 명륜당은 가운데 대청을 두고 양쪽에 방이 있다. 가운데 넓은 대청은 학생들의 교실이고 양쪽 방은 교관들의 교무실 겸 거처로 사용했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학생들의 기숙사 서재와 동재가 있다. 동재는 양반의 자제들이 사용했고 서재는 평민의 자제들이 썼던 기숙사다. 서재 뒤쪽에 '문회재(文會齋)'가 있다. 일명 '사마재'라고도 부르는 이곳은 과거 1차 시험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다.
문회재 앞에는 '양사재'가 있다. 육영재라고도 불렀던 곳으로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향교에 입학하려는 학생들이 늘어나게 되자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 이곳에 모여 공부하게 했다. 당시 광주 사람들의 향학열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 대성전 아래에 있는 동무. 동쪽에 있는 행랑채라는 뜻으로 1951년 이전에는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가 있던 곳이다
임영열
명륜당을 마주하고 또 하나의 문이 있다. 내삼문이다. 이문을 통과하면 제향의 공간이 나온다. 삼문이란 세 칸의 문이란 뜻이다. 능이나 서원, 사당, 궁궐 등 삼문 출입 시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는 예법이 있다.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왼쪽)으로 나온다. 가운데 문은 제관이 출입하는 문이다.
광주향교에서 가장 높은 곳, 제향의 공간에 들어서면 '대성전(大成殿)'과 마주 한다. 공자님의 궁전이라는 의미다. '문묘'라고도 부르는 이곳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동쪽에 안자와 자사 서쪽에 증자와 맹자 등 5성(五聖)과 송나라 2현(宋朝二賢) 정호와 주희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외에도 설총, 최치원, 정몽주, 이황, 이이, 김인후 등 우리나라 18분의 성현(東國 十八賢) 위패도 함께 모시고 있다. 대성전 아래 좌 우측에는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있다. 동쪽과 서쪽의 행랑채라는 뜻으로 과거에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던 곳이다.

▲ 대성전 아래에 있는 서무. 서쪽의 행랑채라는 뜻으로 1951년 이전에는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가 있던 곳이다
임영열
1951년 성균관에서는 "우리나라 유학자들을 격이 낮은 동무와 서무에 모시는 것은 사대주의적 발상이다"라고 결의하여 공자의 위패가 있는 대성전으로 옮겨 모시고 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내고 있다.
그 외에도 유림회관과 충효교육관에서는 광주 유교대학, 한문학당, 충효교육, 다도 및 예절교육, 성년의 날 행사, 전통 혼례식 등을 진행하며 광주의 전통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 충효교육관. 2층 목조 건물로 광주향교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충효교실, 강당 등 다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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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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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액 무료에 병역 면제까지... 입시 경쟁 치열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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