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아리랑비장전 하남호의 글씨다. 받침대에 아리랑 가사가 새겨져 있다.
정명조
영국 출신으로 해방 후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아온 리처드 러트 가톨릭 신부는 한국문화에 관해 왠만한 한국 학자에 비해 더 많은 공부를 하고 그만큼 식견이 넓었다. 아리랑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고 연구도 깊었다.
그는 <아리랑>이란 글에서 아리랑의 어휘가 아홉 가지로 설명되고 있음을 제시했다.
(1) 밀양 군수의 딸 아랑(阿浪)이 아리랑이라는 설(성은 '이'로 알려져 있음)
(2) 신라 창시조인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閼英)이 아리랑이라는 설.
(3)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했을 때 억지로 끌려온 잡역부들이 '내 귀는 먹었소'라는 뜻으로 아리룽(我耳聾)을 불렀는데 그것이 아리랑이 되었다는 설.
(4) 경복궁 개수(改修)에 끌려온 잡역부들이 내가 여기서 고생하오 라는 뜻으로 아날리를 불렀는데 그것이 아리랑으로 되었다는 설.
(5) 잡역부 중의 한 명이 집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워해서 '내 마음 속의 남자'라는 뜻으로 아리랑(我裏娘)을 불렀다는 설.
(6) 아리랑은 한국 피리의 장전타음(長前打音)을 흉내낸 의성(擬聲)이라는 설.
(7) 낙랑(樂浪)의 중국식 발음인 룰랑 내지 낭랑에서 왔다는 설.
(8) 아리랑은 고개의 이름이라는 설(이것은 노래에 아리랑 고개를 넘어라는 후렴이 나오기 때문인데, 문법적인 연락이 잘못되어서 그렇지, 사실은 아리랑 고개라는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9)<트라가>같이 아무 의미 없는 후렴이라는 설.
그러나 맨 나중 아홉 번째의 해석이 가장 그럴 듯 하며, 구체적인 검토를 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한국의 어느 지방에서나 그리고 어떤 아리랑에서나 이 구절이 후렴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주석 5)
러트는 말한다.
"나는 아리랑 중에서 복잡하게 꾸며낸 사랑의 아리랑보다 도조를 물지 못하는 농부의 아리랑과 굽 높은 구두에 정신이 팔린 학생의 아리랑을 더 좋아한다. 그 이유는 농부의 아리랑과 학생의 아리랑이 진짜 인생을 좀 더 정확하게 나타내기 때문이다." (주석 5)
그는 당시 나온 민요집에서,
수수밭 도조는 내 물어 줄게
구시월까지만 참아다오.
이 구절과,
굽 높은 구두를 맞춰 신고
요리 삐끗 조리 삐끗 멋들어졌네.
등을 예시하였다.
"노래(아리랑-필자)는 한 세기를 거치는 동안에 많이 변했다. 그러나 노래가 변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노래가 세월과 함께 달라지는 것은 그만큼 노래가 생명력을 갖고 있는 증거이며, 이것이야말로 아리랑이 민요 목록에서 확고부동 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주석 7)
주석
5> 리처드 러트, <풍류한국>, 20~21쪽, 신태양사, 1974.
6> 앞의 책, 23쪽.
7> 앞의 책, 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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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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