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신문> 전경
박진도
- 입사 후 3년 만에 옥천읍에서 자동차로 40분이 넘는 청산면으로 이사를 해서 신문사로 출퇴근했다. 왜 그런 불편을 선택했나. 청산면에서의 생활이 그 후의 활동에 자양분이 되었고 하는데.
"입사 후 3년쯤 반복되는 행사와 취재는 익숙해진 만큼 편해졌고 정체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경우, 대부분 서울이나 광역 언론사로 이동한다. 그런데 왠지 그런 행위가 초심에 이율배반적인 것 같았다. 대신 변화가 필요했다.
2005년 옥천읍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청산면으로 이사했다. 자동차로 40분이 넘는 거리를 출퇴근해야 하는 고생을 감수했다. 면의 삶은 읍과 달랐다. 읍은 갈수록 도시화되었지만, 면은 여전히 공동체가 살아있었다. 아침에 청산초에 가서 아이들과 축구하고, 할아버지들한테 게이트볼도 배웠다. 면 젊은 공무원들하고도 친해져 몇 명은 우리 집에 같이 살았다.
취재는 취재대로 하면서 슬슬 무언가를 시작했다. 청산초 야간도서관 개방을 위해 학교랑 접촉했고 자원봉사자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해 신협, 우체국, 공무원, 학부모 등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야간도서관을 운영했다. 그 사례로 책읽는사회만들기와 <한겨레신문>에서 주는 작은도서관 대상을 받아 1억 원으로 1층 도서관을 리모델링 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공부방, 벼룩시장, 금요영화관 등 여러 가지를 주민들과 함께 기획했다."
- 다시 청산면에 들어가게 되면서 느낀 점은?
"인구 3000명 선이 무너졌고 초등학교 전교생이 30명밖에 되지 않았다. 최근 15년 동안 인구감소율이 21%나 돼서 9개 읍면 중에 가장 높았다. 청산은 삶의 여건이 너무 열악해졌다. 그런데 들어와서 살려 해도 살 집이 없었다. 공공인프라는 말할 것도 없다. 읍내 하나뿐인 수영장, 영화관, 체육시설, 로컬푸드 직매장 등을 이용하려면 버스를 타고 한 시간가량 가야 이용이 가능하다.
청산면에서 잊을 수 없는 분이 계신다. 박약국의 박명식님이다. 박약국은 365일 청산을 밝히는 등불이었다. 버스를 놓친 아이들이 앉아서 언제고 쉴 수 있는 마을의 느티나무였다. 늘 그 자리에서 지역의 미래를 고민하고 그 실천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2018년 1월 7일 새벽에 운명한 박명식 약사와 약속을 한 것이 있다. 청산을 떠나올 때 곧 다시 돌아오겠다고. 그 약속이 너무 늦어졌다. 지금에서라도 지킬 수 있어 다행이다."
- 3년간 청산면에서 살다가 다시 옥천읍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옥천신문> 입사 후 10년 차 되던 해에 <옥천신문>을 떠났다. 퇴사 후 3년간 배달 기사를 한 것이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했다.
"옥천에 와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빨간 줄을 치면서 한 줄 한 줄 읽어가고 신문지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일주일 내내 붙잡고 기사를 읽는 모습은 큰 감동이었다. 하지만 힘들기도 했다. 매주 돌아오는 마감과 기사에 대한 항의와 시시각각 조여 오는 긴장감은 피를 말리게 했다. 그래서 10년째 되던 해에 신문사를 그만뒀다.
연고도 없는 옥천을 그때 떠날까도 생각했지만, 이상한 자장이 옥천에 붙들어 맸다. '기자' 완장을 떼고, '기사'가 되어 트럭을 몰며 학교급식 배달을 했다. 또한 노인장애인밑반찬 배달과 영양플러스 배달도 해봤다. 기자 10년을 하면서 옥천에 대해 모르는 것 없을 테고 웬만한 것은 다 꿰고 있다는 오만과 자만이 있었다.
그러나 머리 쓰는 일이 아닌 몸을 쓰는 일을 하고, 기자 완장을 떼고 주민으로서 사람들을 만나보니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옥천에도 못 만나본 사람이 안 가본 곳이 수두룩 빽빽하던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옥천신문>에 돌아가면 더 잘해야겠다고 반성했다. 사실 그들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다. 옥천에 100만 원대 미만 소득자가 34%에 달한다는 통계 수치를 접했을 때 자각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우리는 이들에게 얼마나 마이크를 가져다주었는가 자성했다."
매년 새로운 사업을 개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