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의 송파 인근지도에서 길은 검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한양 도성을 나온 길이 잠실섬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연결된다. 파란 원이 송파, 빨간 원은 잠실, 노랑이 남한산성, 초록은 도성이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다리가 놓여 일자리를 잃게 된 사공들
한강에 나루터는 언제까지 존재했을까? 과거 기사를 보면 교량 건설과 함께 그 기능을 서서히 잃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와 함께 뱃사공도 일자리를 잃었을 것이고.
<경향신문> 1970년 10월 16일의 '서울, 새 풍속도 (8) 나루터를 쫓는 다리' 기사는 "다리가 놓이고 나면 나루터는 할 일이 없어"지는 현실을 다룬다. 당시 건설 중인 '영동교'와 '잠실교'를 언급하며 "잠실, 뚝섬, 송파나루도 사라질 날이 멀지 않았다"고 예측한다.
또한 기사는 "신천나루터에서 31년간 사공으로" 일해온 양인환씨의 사연을 전하며 그의 가문에 전해 내려온 비사도 함께 소개한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인조 일행을 양씨의 선조가 건네줬다는 것. 역사적 순간을 목격했던 뱃사공 가문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1년여가 지난 <조선일보> 1972년 1월 11일의 '떠나야 하는 최후의 뱃사공, 잠실교 준공 앞둔 숙이 아버지' 기사는 잠실대교 준공을 6개월 정도 앞에 둔 신천나루와 사공의 모습을 전한다.
1949년부터 신천나루에서 나룻배를 몰아온 숙이 아버지, 김용태씨의 사연은 나룻배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처음에는 열 명 정도 타는 작은 배였지만 2톤짜리 배를 거쳐 5톤짜리 배로 커졌고, 노를 젓는 방식 대신 통통배가 뒤에서 나룻배를 밀어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그런데 숙이 아버지는 월급 사공이다. 승용차 여러 대를 실을 수 있을 정도로 배의 규모는 커졌지만 숙이 아버지의 벌이는 시원찮다. 그나마도 잠실대교가 준공되면 일자리도 잃게 된다. 이참에 숙이 아버지는 "가재를 팔아서 채소 장사라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기사는 전한다.
<조선일보> 1972년 7월 1일의 '나룻배에 판자집, 가족 싣고 그 뱃사공은 떠났다'는 기사는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잠실대교 개통 전날에 신천나루의 어느 사공이 "자신이 몰던 4톤짜리 나룻배 위에 그가 살던 오막살이 한 채를 고스란히 떠얹고 세간과 식구와" 한강 하류로 떠나는 모습을 전하는 기사다.
주인공은 "신천나루 최후의 뱃사공 송택슬(44)씨"였다. 그는 '숙이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고한다. 위에서 인용한 기사에서 채소장사를 해보겠다던 그 숙이 아버지다. 하지만 숙이 아버지는 "장삿길로 들어서려고 이사 준비를 하다 지붕에서 떨어져 오른쪽 팔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송씨에게는 어떤 계획이 있었을까? 그는 "물 따라가다가 마땅치 않으면 강가에서 채소나 지어먹겠다"고 소원을 밝힌다. 한강 하류의 나루터 이곳저곳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여의찮으면 농사를 짓겠다는 것. 일자리를 잃어도 강가를 떠나기 쉽지 않은 사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기사에 따르면 신천나루는 1972년 6월 20일에 폐쇄되었다. 1971년만 해도 12명이던 사공이 다리 준공을 앞두고 서서히 떠나 폐쇄될 때는 5명만 남았다고. 하지만 송씨가 일자리를 얻으려고 향한 한강의 하류도 조만간 나루가 없어질 것은 분명하다고 기사는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