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9일(목) 오전 10시 30분 대법원 정문 앞에서 원고인들 및 관련 여성단체, 공동변호인단이 참여한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 청구소송 대법원 판결 선고를 환영하는 기자회견이 진행되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구조적 피해와 다층적 고통을 넘어
대법원 판결에 대한 원고들의 가장 강력한 감회는 믿을 수 없었지만 믿어야만 했던 희망을 결국 봤다는 놀라움이었다. "2014년 처음 소송을 한다고 했을 때 기대하지도 않았다. 감히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대법,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 책임 인정…"국가가 성매매 조장", 여성신문, 2022.09.29.)
포주들과 결탁한 경찰서, 보건소, 양장점, 가구점, 슈퍼, 택시, 버스, 그저 욕을 하는 주민들과 동네 아이들까지. 둘러싼 모든 것에서 위축되는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대상으로, 아직도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연관된 국가 범죄를 밝히는 일은 그야말로 꿈에서조차 요원하다고 생각할 법 했다.
나의 피해를 드러내자고 했을 땐 믿어지지 않았다. 그 시절 나는 감히 정부가 하는 일에 반기를 들겠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 시절 정부는 기지촌에서 나를 이용하면서 달러를 벌면서 애국자라 칭하고 많이 벌어준다 고맙다 하였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면 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은 여자이었다. 기지촌에서 나올라고 해도 나올 수 없게 만든 국가로부터 나는 나의 손가락질 받은 여자가 아니 평범한 여자임으로 나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었다. …(중략)… 증언준비를 하는 동안 옛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북받쳐 올라왔다. 바보 같이 그 안에서 답답하게 당하고 살았을까? 왜 국가에게 이용을 당했을까? - 2018. 5. 28. 기지촌여성인권연대 심포지엄 '한국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역사와 소송의 의미' 원고 당사자 기록 '꼭 알리고 싶다' 중
피해자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고 정부에 요구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고 사실관계를 전혀 알지 못했던 국민들에게 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이번 소송은 2014년 당시 소 제기 자체로도 일부 유의미했다. 명확한 증거와 전후 관계, 구체화 및 유형화한 피해 경험을 제시하며 '사회의 치부'로 낙인화된 '양공주'가 실은 가부장제와 국가주의 하의 구조적 피해자임을 분명히 한 것은 향후 사회적 논의 확대를 위한 시작으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지점이었다.
성별화된 섹슈얼리티가 주된 이데올로기로 작동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국가 권력이 정책과 각종 유착으로 뒷받침하며 폭력을 휘둘렀음을 더 많은 국민들이 인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8년, 고통을 감내하고 기억을 헤집어낸 원고들과 오랜 시간 각종 증거자료를 모으고 생성하고 기록한 여성단체 활동가들의 피땀 어린 노력은, 결국 정부의 주장을 논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뒷받침했고 대법원 승소 판결까지 이끌어냈다.
그러나 국가가 국민에게 죄를 지었음을 사법부가 인정했을 뿐, 국가는 아직 사죄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어떠한 후속조치도 진행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며 해당 문제를 사회구조적으로 보완하고 예방하는 등의 행정과 입법의 과제들은 산적해 있으며 사실상 그중 어느 것도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다.
2013년 '기지촌 성매매 피해여성 진상규명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안'을 위한 공청회가 열렸고, 2014년 7월 새정치민주연합 김광진 전 의원이 '주한미군기지촌 성매매 피해 진상규명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을 대표발의했다. 법안은 국무총리 소속 위원회 신설, 의료 및 생활 지원, 명예 회복, 법률 지원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2017년 7월에는 더불어민주당 유승희 전 의원 등 18명이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및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해당 법안에는 임대주택 우선 공급, 임대보증금·의료비·간병비·생활안정금 지원 등이 규정되었다. 2020년에는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의원이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및 관련 연구, 피해자 지원 등을 포함한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및 피해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김광진 전 의원의 법안은 안건으로 상정되지도 않았다. 경기도에 조례 제정 제안을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이뤄진 것은 경기도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실태조사였고 이마저도 평택대학교 학생들과 햇살사회복지회 실무자들의 손으로 이뤄졌다(미군위안부, 그 생존의 기억 #마지막회. "우린 태어난 이 나라에서 버려졌다", 시사저널, 2016. 9. 8., 해당 '경기도 기지촌 여성 지원 등에 관한 조례'는 2020년 4월 제정되었으나 경기도는 상위법 및 대법원 판결 부재 등을 이유로 법적 임무를 미이행하고 있다). 유승희 전 의원의 법안은 수년 간 국회상임위를 계류했고, 정춘숙 의원의 법안 역시 마찬가지 신세다.
미군 위안부와 기지촌 성매매 문제는 국제관계의 맥락에서 이어진 힘의 구도, 전쟁, 외국군대의 주둔에서 발생했다. 국내에 잔존하는 가부장제와 성차별의 횡포, 독재정부의 만행에 초국적인 역사·정치·사회 문제가 얽혀 극대화된 희생을 낳은 것이다.
이는 한국 뿐만 아니라 미군으로 대표되는 외국군의 주둔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고, 해당 국가 혹은 지역의 가부장 문화, 보편적 인권, 경제개발 수준, 인종 혹은 민족 구성 등 다양한 조건들과 결합하여 차이를 보였지만 결국 전시에 이어 전후(戰後)까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의 구조가 공고해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식민주의, 제국주의, 자본주의, 군사주의, 민족주의, 갖가지 초국적 이데올로기들이 여성을 폭력과 배제의 대상으로 이용해온 미군 위안부 문제의 추가적인 진실 규명, 이와 같은 문제 예방을 위해 다층적 구조 속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 현실적 피해자 지원을 위한 정부와 국회의 적극적 역할 수행, 제대로 된 역사의 기록과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길은 여전히 남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어두운 눈으로 서면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세밀하게 끌어낸 이들이 결국 제대로 찍어내고야 만 첫 번째 마침표는 본격적인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분명한 분기점이자 방향표가 되지 않을까 한다. 페니실린의 부작용으로부터, 포주와 기도의 무자비한 폭력으로부터, 몽키하우스의 창살로부터, 고통을 준 모든 것들로부터 피하지 않고 맞선 이들과 그 고통을 나눠지고자 오랜 시간 곁에서 연대하고 함께 노력한 이들 덕분에, 2022년 9월 29일 그래도 우리 사회는 조금 더 정의로운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되었다.
[참고자료]
김현선, 신영숙(2014). 『미군 위안부 역사 자료집』. 새움터.
김현선, 김정자(2013).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한울아카데미.
새움터(2009).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두 번째 이야기』.
캐서린 H.S. 문(2002). 『동맹 속의 섹스』. 삼인.
기지촌여성인권연대(2018). '한국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역사와 소송의 의미' 심포지엄.
하주희(2017).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배상 청구소송의 진행과 의미, 입법의 방향」. 미군 위안부 소송결과의 의미와 법제정을 위한 토론회.
신영숙(2017). 「한국 내 미군 위안부 현황과 지원 과제」. 미군 위안부 소송결과의 의미와 법제정을 위한 토론회.
신영숙(2015). 「미군 위안부의 현실과 과제」. 국가폭력과 여성인권: 미군 위안부의 숨겨진 진실 토론회.
국가 책임 인정…"기지촌 양공주? 이제 나도 대한민국 국민", 「뉴시스」, 2022. 10. 12.https://www.newsis.com/view/?id=NISX20221011_0002044205&utm_source=dable
대법,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 책임 인정…"국가가 성매매 조장", 「여성신문」, 2022. 9. 29.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8417
원고 엄숙자 외 122명, 피고는 대한민국, 「뉴시스」, 2022. 2. 8.https://newsis.com/view/?id=NISX20220204_0001746898&cID=10803&pID=14000
'미군 위안부'가 던지는 질문, 「경향신문」, 2017. 2. 5.https://www.khan.co.kr/opinion/jeongdong-column/article/201702051550001
미군위안부, 그 생존의 기억 #마지막회. "우린 태어난 이 나라에서 버려졌다", 「시사저널」, 2016. 9. 8.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57617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1987년 창립된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지속가능한 성평등 사회를 만들고 여성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연대를 이뤄나가는 전국 7개 지부, 28개 회원단체로 구성된 여성단체들의 연합체입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