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올바른 이름을 불러주어야 할 때

[은밀한 맥락을 찾아서] 11. 상식 너머의 상식-3

등록 2022.11.13 11:25수정 2022.11.13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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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9일부터 30일 사이 핼러윈 축제시기에 이태원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소해 보이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논란은 그 사건을 부르는 이름에 대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태원 압사 사고'였다가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이태원 압사 참사'로, 그리고 그 사건의 사망자와 부상자들을 희생자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정부는 일방적으로 그것을 다시 '이태원 사고'와 '사망자'라고 명명하고, 영정이나 위패도 없이 애도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이제는 지역의 이름에 낙인을 부여할 수 있다는 우려로 '10․29 참사'로 부르는 언론매체들이 있고, 그 방향으로 움직여가고 있는 듯합니다.

사고, 사건, 참사... 사망자, 희생자, 피해자... 뭐라고 부르든 무슨 상관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그 이름에 우리의 생각이 담겨 있고,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든 사물이든 현상이든, 그 이름을 짓는 것과 불러주는 것은 늘 중요합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사회복지와 관련된 현상이나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 대해 살펴보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고 더 나은 대안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그에 맞는 이름을 불러줘야 할 때
그에 맞는 이름을 불러줘야 할 때권지성
 
저는 여러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이 말하거나 쓰는 것을 보면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용어들을 잘못 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개념들은 이전에 너무 오랫동안 쓰다 보니 습관으로 굳어져서 새로운 명칭으로 바꾼 지 꽤 오래 되었는데도 그대로 쓰기도 합니다.

먼저 특정 인구집단이나 현상, 사물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쓰는 단어들을 나열하고, 제가 아는 수준에서, 그중에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이름을 중심으로 기술하겠습니다. '바람직하다'는 기준에 대해서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저는 일단 그것을 우리나라의 법령에 근거한 명칭으로 삼겠습니다. 법률은 어쨌든 그 시대, 그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에 따라 결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첫째, 보육원, 고아원, 보육시설, 아동양육시설, 공동생활가정입니다.

이 이름들의 대부분이 가리키는 곳은 부모가 기르지 못하게 된 아동들을 국가가 정부의 책임 하에 민간에 위탁하여 보호하는 집단생활시설입니다. 아동복지법 등의 법률에 명시된 공식적인 명칭은 '아동양육시설'입니다. 그리고 그 시설 유형 안에 소규모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공동생활가정'이 있습니다. 참고로 공동생활가정은 아파트나 일반주택 등 일반적인 주거공간에서 7-8명의 아동을 3명 정도의 사회복지실무자가 보호하고 양육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일반 사회 구성원들은 이곳을 흔히 '보육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명칭은 아니지만 다른 용어들과 혼용되면서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했으면 합니다. 보육원은 아동양육시설 중 일부가 자신의 고유명사로 붙인 이름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즉, OO보육원, OO애육원, OO사랑의 집, OO영아원, OO원 등 다양한 아동양육시설의 이름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일반명사처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육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동양육시설에게는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시설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도 있겠죠?

그리고 혹시 비슷한 이름을 가진 '보육시설'은 어디를 말하는지 아십니까? 집 근처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어린이집'의 공식 명칭입니다. 보육원과 보육시설. 비슷하지만 많이 다른 시설 유형입니다.


그렇다면 '고아원'은요? 종종 아동양육시설을 두고 고아원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대체로 부적절한 표현입니다. 국어사전에는 '부모를 여의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아 몸 붙일 곳이 없는 아이'로 정의하고 있는데, 아동양육시설에는 부모를 여읜 아동은 거의 없고, '버림받은' 아이도 소수에 불과하며, 설사 그 말이 맞다 하더라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동양육시설에서 생활하는 아동들의 80% 이상은 양쪽 부모가 모두 있거나 적어도 한쪽 부모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옛날에는 '유기된' 아동들도 적지 않았지만, 지금은 역이나 경찰서, 시설 앞에 유기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아동학대로 인해 시설에 보호되는 아동의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법률적 명칭이라고 하더라도 아동양육시설이라는 이름도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설'이라는 단어가 주는 서늘한 느낌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금 운영되고 있는 시설들의 대부분은 총 인원이 50명을 넘지 않으며, 규모가 크든 작든 내부적으로는 일반 가정집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 여러 개의 생활공간에서 8명 안팎의 아동을 3명의 성인이 교대로 양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런 시설들을 '공동생활가정' 또는 '같이 사는 가정'으로 통일해서 부르고, 규모에 따라 큰 공동생활가정, 작은 공동생활가정으로 구분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둘째, 친부모, 양부모, 친양부모, 친생부모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어떤 아동의 부모를 '친부모'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입양된 아동의 부모를 가리킬 때 잠깐 멈춰 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어떤 아동을 생물학적으로 임신하고 출산한 부모를 친부모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맞겠죠? 그런데 입양분야에서, 그리고 국어사전에서 입양은 양친과 양자가 법률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친부모와 친자식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입양가족 내에서 입양된 아동의 친부모는 입양부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출산한 부모는? 입양특례법에서는 그들을 '친생부모'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입양부모를 '친양부모'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조금 복잡해 보이죠? 그렇지만 깊이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입양부모와 입양아동, 그리고 그들이 이룬 입양가족을 만나게 되었다면, 그냥 평소 하던 대로 그 부모를 '부모님'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만약 그 가족을 깊이 사귀게 되었고, 어쩌다 생물학적 부모를 염두에 두면서 가리키게 되었다면, 그들은 '친생부모'라고 부르면 되고, 앞에 있는 입양부모를 아동의 친부모로 생각하고 대하면 됩니다. 입양가족을 대할 때 이전에 보아왔던 막장드라마의 진부한 설정인 '출생의 비밀'과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친모'의 이미지를 떠올리시면 안 됩니다. 이것과 관련된 진지한 논의를 보고 싶으시다면 입양과 관련된 질적 연구 논문들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셋째, 장애자, 불구, 장애우, 장애인입니다.
이 용어들은 더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저보다 연배가 많은 어르신들, 가끔은 제 또래나 어린 어른들도 잘못 쓰는 경우를 보게 되어 굳이 언급합니다. 현재 공식적이고 일반적인 명칭은 '장애인'입니다. 장애 유형과 상관없이 굳이 그 명칭을 쓰게 되는 경우에는 모두 '장애인'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됩니다. 장애자나 불구라는 표현은 낙인을 부여할 수 있고 비하하는 표현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써서는 안 되며, '장애우'라는 표현은 당사자들이 거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장애를 겪는 분들의 입장에서 우리는 '친구'가 아니니까요.

저는 이전에 쓴 다른 기사에서 장애인이라는 명칭을 쓰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장애인을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장애를 겪는 사람'으로 이해하자는 제안을 한 바 있습니다. 장애를 겪고 있는 분 앞에서 그분을 장애인으로 부르는 것은 당연히 예의 없는 일이겠지만, 사실 우리는 무심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더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환자'도 마찬가지겠지요? 병의원에서 입원환자나 외래환자를 '환자분'이라고 부르다가 이제는 'OOO님'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굳어진 것은 다행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3시간을 기다려서 겨우 3분 면담하고 돌아서 나와야 하는 종합병원에서 우리는 자신이 여전히 수많은 환자들 중의 하나로만 취급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합니다.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영화 '패치 아담스'에서 주인공 패치는 시니어 의사가 환자를 부를 때 사례번호로 부르고, 그 앞에서 질환과 후유증을 거침없이 읊어대는 것을 보고는 그 환자에게 이름을 묻고 그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아줍니다. 우리 각자는 존엄한 인간으로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번호가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불러질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이태원 골목에서 가장 가까운 종합병원의 영안실 복도에 흰 천으로 덮인 채 누워있던 희생자들의 사진을 보며, 우리는 존엄성이 위협받고 있음을 느낍니다. 영정사진도 위패도 없이 차려진 분향소 앞에서는 누구도 기억할 수 없고, 마땅히 애도할 수도 없습니다.

이어서 장애나 질병과 관련된 이름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조현병'은 정신분열병의 새로운 공식 이름입니다. 조현병을 겪는 환자는 '정신이 분열된' 상태가 아니라 현악기의 줄을 제대로 고르지 못하면 특이한 소리가 나듯이 그가 가진 마음이 제대로 조율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을 반영한 것입니다. 가끔 정치인들이 상대 진영의 누군가를 비하할 목적으로 정신분열병 환자 같다든가 정신장애인이라든가 하는 말을 한 뒤 항의를 받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도 오래전에 SNS에 그런 표현을 썼다가 관련 시설에서 일하시는 분의 일침을 맞고 사과한 적이 있습니다. 같이 주의하면 좋겠습니다.

'간질'이라고 부르던 질병과 장애는 이제 '뇌전증'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바꾼 이름이 낯설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지만, 낙인이나 오해를 피하기 위한 대안이라고 하니 잘 기억해두고 익숙해져야겠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을 통해 꽤 낯익은 질병인 '나병'의 공식 명칭은 '한센병'입니다. 옛날에는 문둥병이라고도 불렀으나 모두 낙인을 부여하는 이름이므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한글성경의 새로운 번역본에도 이 질병을 '나병'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판본을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 성경을 인쇄하는 기관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합의를 이끌어 내어 '한센병'으로 바꾸어 기록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밖에도 성경에는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 지체장애인, 정신장애인 등을 가리키는 듣기 불편한 용어들이 많습니다. 물론 성경만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기회가 되면, 그런 용어들을 한꺼번에 모두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넷째, 특히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통해 생계급여 등 각종 급여를 받는 사람을 수급자, 그리고 그런 권리를 가진 사람을 '수급권자'라고 부릅니다. 수급자라고 부르더라도 제도 안에서는 그 분들이 급여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입니다. 그 이전에 있던 생활보호법과 제도에서는 급여를 받는 사람을 '수혜자'라고 불렀습니다. '혜택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이 말에는 '그럴 자격은 없지만 국가가 혜택을 준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 즈음부터 그것을 '권리'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사회에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수준은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급여를 받는 사람은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동,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만한 소득과 재산이 없고 자녀 세대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노인, 장애나 질병 등으로 인해 근로능력이 없거나 근로능력은 있지만 자녀 양육 등의 이유로 충분한 소득을 얻을만한 일을 할 수 없는 한부모 가정의 여성 또는 남성과 그 자녀 등입니다. 이 분들이 주로 세금으로 걷어 확보한 국가 재정으로 지출되는 급여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할 것인지, 그럴 자격이 없지만 '불쌍하니까 어쩔 수 없이' 혜택을 줘도 된다고 생각할 것인지 여부는 국민 각자가 판단할 몫일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이미 20년 전부터 그것을 '권리'로 인정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섯째, 정해진 주거지 없이 길거리에서 잠을 자거나 그들을 위해 마련된 시설에서 일정 기간 생활하는 사람을 '노숙인'이라고 부릅니다. 이전부터 있었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그 규모가 커지고 쟁점이 되면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 당시에는 '노숙자'라고 불렀습니다. '者' 대신 '人'을 붙이는 것이 그나마 더 인격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부여되는 낙인이 가벼워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분들의 일부는 길거리가 아니라 '쪽방'과 같이 열악하지만 그래도 더 안전한 주거지에서 잠을 자기 때문에, 그리고 겉으로는 '부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로능력을 가진 다수에게는 새벽시장의 숨겨진 진실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 분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다른 기사에서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서는 노숙인이 공식적이고 올바른 명칭이라는 점만 밝혀둡니다.

이것도 오래전 일이지만,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이 약자를 두고 또는 서로 농담처럼 '애자'나 '숙자'라고 부르고, 그것이 장애인과 노숙인을 빗대어 부르는 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제는 흘러간 옛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만, 여하간 우리가 적대시하는 누군가를 비하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명칭을 빗대어 부르는 것은 그분들에게나 우리 자신에게나 유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 비하해서 부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막대한 부나 막강한 권력,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되었지만, 지적 수준이나 공감능력이나 업무수행능력이 너무 낮아서 그가 가진 지위에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때, 그런데 우리들 각자는 그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워서 그나마 조롱이라도 하고 싶을 때, 뭔가 적절한 표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에 걸맞은 이름 말입니다.
#은밀한 맥락을 찾아서 #사회복지 #수급권자 #올바른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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