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후 첫 출근길 문답윤석열 대통령이 5월 1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 출근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월 취임 때만 해도 언론에 자신감 있게 행동했다. 출근마다 '출근길 문답'도 도입했다. '소통'을 강조하면서 이를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의 필요성과 연결시켰다. 그랬던 그는 불과 6개월 만에 태도를 바꿨다.
지난 18일 출근길 문답 때는 MBC 기자들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배제한 조치를 해명하면서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MBC가 국가 안전보장의 핵심 축인 동맹관계를 왜곡하는 보도를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20일에는 도어스테핑이 열리는 대통령실 로비에 가림막을 설치한다는 방침이 언론에 보도되더니 21일엔 출근길 문답을 중단한다는 결정을 통보했다. 윤 대통령이 자신과 국민·언론 가운데 가림막을 세운 것과 같다.
대통령 취임 반년 뒤... 노골적으로 언론 탄압한 박정희
윤 대통령의 '언론탄압' 논란이 대두되자 여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소환했다. 언론탄압이라는 영역에 윤석열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간 공통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1964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유명한 언론탄압 일화를 낳았다. 쿠데타 2년 6개월 뒤인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는 반년 뒤인 1964년 6월부터 언론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다가 언론 탄압의 결정판으로 불리는 '언론윤리위원회법'까지 만들어냈다.
1964년 8월 5일 시행된 이 법은 언론의 자율 규제를 표방하면서도 언론을 옥죄는 장치들을 갖추고 있었다. 전국의 신문사 발행인과 방송국 사장들을 언론윤리위원회 회원으로 강제 가입시키는 규정이 그중 하나였다.
이 법은 발행인과 사장들을 윤리위원회의 당연직 회원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언론윤리를 위반한 회원을 자격정지 또는 제명시킬 수 있도록 했다. 언론사 발행인과 사장을 윤리위 회원이 되도록 규정했으므로, 윤리위에서 제명된 발행인·사장은 언론계에서 자기 위치를 유지하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 법은 윤리위를 통해 언론사를 장악하려는 박 정권의 의도를 반영하는 악법이었다.
배경 그리고 과민반응
자신감이 넘칠 만한 출범 6개월 차 대통령이 언론탄압에 나선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배경이 박정희의 심적 부담을 가중시키고 언론에 대한 과민반응을 유도한 측면이 컸다.
윤 대통령처럼 박정희도 국민적 반대를 무시하고 한일관계 복원을 추진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국민들이 관계 복원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그저 '일본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식민지배 청산 없이 굴욕적 방법으로 양국관계를 복원하는 것에 반대했을 뿐이다. 박정희는 이런 국민적 정서를 무시한 채 무조건적이고 굴욕적인 관계 복원을 추진했다.
국민들이 그런 박정희를 거부했다는 점은 1964년에 폭발한 6.3운동이 증명한다. 박정희는 일본의 사과·배상 없이 식민지배 문제를 봉합하는 동시에 한국 경제를 일본에 종속시키는 시스템을 추진했다. 훗날 1965년 체제로 불릴 이 시스템에 국민들은 격렬히 저항했다. 1964년 3월 24일에는 8만 명이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참가했고, 5월 20일에는 박정희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땅속에 묻어버리겠다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5월 25일에도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문제의 6월 3일에는 박정희 하야를 요구하는 구호가 시위 현장에 울러퍼졌다. 이날 박정희는 서울 일대에 비상계엄령을 발포했다. 박 정권은 이처럼 군대까지 동원해 국민들을 억누르다가 이듬해인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협정 체결을 끝내 관철시켰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격렬한 국민적 반발을 몸으로 부딪히게 됐다. '친일 매국노' 소리를 들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조건 강행했다. 쿠데타로 인한 정통성 결여를 경제개발로 메우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미국의 요구에 부응해야 할 필요성이 그를 무리수로 밀어넣었다.
아시아·아프리카의 비동맹운동(제3세계 운동)과 유럽의 경제적 단결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1950년대 후반 이후의 미국은 한미일 삼각동맹을 모색하고 이를 기반으로 영향력을 다시 팽창시키는 방법으로 자국 패권의 추락을 막고자 했다. 박정희는 이 같은 미국의 필요 때문에도 한일관계 복원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들과 정면으로 충돌한 박정희는 원래대로라면 자신의 불만을 국민들에게 발산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았으므로, 만만한 언론을 향해 자신의 불만을 대거 표출했다. 한일관계로 인한 국민들과의 충돌이 박정희 언론탄압의 원인이 됐다는 분석은 당시의 언론보도로도 확인할 수 있다.
1964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언론파동 서막에서 종막까지'라는 기사는 "언론파동의 잉태는 멀리 6.3사태 선포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라면서 "청와대에서 6월 9일 밤에 열린 각의를 통하여 고위층이 '학생 데모를 선동한 책임은 언론에 있는 만큼 그 선후(善後)책을 강구하라'고 이수영 공보장관에게 강력히 지시된 데서 시작된다"라고 보도했다.
한일협정 반대투쟁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박 정권은 이를 소수 세력의 선동으로 몰아갔다.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학생뿐 아니라 야당에도 책임이 있고 언론에도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려 했다. 국민들이 자신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언론을 겨냥한 사후 수습책을 강구하라고 공보부장관에게 지시했던 것이다.
위 기사는 "언론에 책임을 돌리려는 집권층의 사고는 계엄 전, 박 대통령의 '일부 언론, 일부 정치인, 일부 학생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한 광주 발언에서도 능히 짐작될 수 있다"라고 보도했다. 국민들과 정면으로 맞서 한일관계 복원을 추진하는 박정희가 비상계엄 이전 심리상태가 언론에 대한 화풀이로 이어졌다는 점이 당시 사람들의 눈에 포착됐던 것이다.
언론의 저항, 박정희 정권의 유치한 응수... 결과는
박정희가 계엄선포 전부터 언론보도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는 점은 그의 계엄선포에는 언론 겁주기의 성격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펜을 든 기자들을 군대의 총·대포로 억누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총·대포는 펜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박정희의 언론탄압에 맞서는 언론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언론인들은 저항의 수준을 뛰어넘어 정권에 대한 압박에까지 나섰다. 언론윤리위원회법철폐투쟁위원회도 결성하고 전국언론인대회도 열었다. 8월 17일에는 한국기자협회를 발족시키며 투쟁의 수위를 높였다.
기자협회 발족 전인 11일에는 언론의 고강도 압박이 있었다. 박정희가 경남 진해에서 언론윤리위원회법의 강력 시행 의지를 천명한 그날, 언론사들은 대통령·국회의장·대법원장의 8.15 경축사 보도를 거부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개인 방송이 없었던 시절이라, 언론사가 보도해주지 않으면 정권의 국정 홍보가 불가능했다. 이 점을 무기로 언론사들이 박 정권을 압박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