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구미지부 옆 공원.
안건모
민주노총 경북지역본부 구미지부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배태선씨를 인터뷰하기로 했다. 그동안 어느 매체에도 인터뷰를 해서 자기를 드러낸 적이 없었던 배태선씨는 대구 경북 지방 말투로 거침없이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놨다.
배태선씨는 오랫동안 노조 일을 해서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경북대 3학년 중퇴란다. 아니 제적을 당했다고 했다.
"총학생회 회장이 징계 제적을 당하면서 우리가 총장실 점거를 했고, 그중에 4학년 선배 두 명, 저 이렇게 세 명이 제적을 당한 거지. 열 몇 명이 들어갔거든. 그때 3학년 동기들도 많았지. 나만 제적이 됐어. 그거 나도 이해를 못하겠다."(웃음)
그 한 가지 사건에서, 배태선씨의 투쟁 성향이 짐작됐다.
배태선씨는 제적을 당한 뒤 공장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구미로 갔다. 공장에서 일하는 도중, 1987년에 노동자대투쟁 시기 때 복학 조치가 떨어진다. 하지만 배태선씨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제가 아버지를 설득한 거죠. 공장 생활을 하는 데 대학 졸업장이 필요가 없다. 그래서 자퇴를 한 거죠."
배태선씨에게 그런 '건강한' 의식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궁금해졌다. 부모님의 영향이었을까. 어릴 적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배태선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워낙 많은 책을 봤어. 그때 내가 본 책 중에 정확하게 기억이 나는 하나는 <어린 왕자>였고, 또 하나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어요. 근데 너무 어려웠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문학과지성사, 1978)은 1970년대 도시하층민의 고통을 드러낸 책이다. 그런 책을 읽은 영향일까. 배태선씨는 어릴 때부터 차별에 대해 민감했다.
"교장이 공부 못하는 애들은 저렇게 취급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런 생각이 너무 확고했던 것 같고, 그래서 때려서라도 애들 공부시켜야 된다, 이것도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그런 전반적인 학교 분위기에 반발심이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배태선씨는 빈 가방을 들고 다닐 정도로 반항아였지만 공부는 남들보다 뒤지지는 않았다. 오락 반장을 할 정도로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배태선씨는 별다른 일 없이 경북대에 입학했다. 입학식을 하는 날 웬일인지 엄마가 오셨다. 그리고 입학식이 끝나고 엄마가 말했다.
"나한테 '넌 탈춤반엔 들어가지 마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 '왜?' 이러니까. 아니 학교 교수들이 학부모를 불러서 '탈춤 서클은 들어가지 마라'라고 이야기를 아예 처음부터 했대요."
그 당시 탈춤반은 대개 운동권 학생들이 많아서 그랬을까. 배태선씨는 사실 그런 서클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고 놀기에 바빴다. 그런데 선배가 탈춤반에 가입을 안 해도 좋으니 한 번 놀러오라고 꾸준히 유혹했다.
"그러고도 뭐 하여튼 간에 노느라 바빠서 못 갔어요. 하루는 1학년 겨울 방학 때 우연히 갔는데 사람들이 막 '어서 와' 이러면서 '네 이야기 너무 많이 들었어' 이러더라고. 이게 무슨 황당한 상황인가 생각을 했죠. 그런데 고등학교 때 연합독서토론회를 같이 했던 선배가 탈춤반 학우들에게 자기가 후배 한 명을 데리고 올 건데 '굉장한 애가 올 거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 했다는 거지. 왜 그랬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배태선씨는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지 않아 그 내막은 알 수 없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어떤 '카리스마'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할 뿐이다. 그렇게 탈춤반에 드나들던 배태선은 어느 날 광주항쟁 영상을 보게 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어났던 1980년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때서야 고등학교 때 탈춤을 가르쳤던 대학생 강사가 왜 수배를 당하면서 사라졌는지 알게 됐다. 그리고 곧바로 1985년에 초판이 나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編), 황석영 기록)을 보게 되면서 이 사회 현실에 눈을 번쩍 뜬다. 그리고 학생운동에 첫발을 뗀다. 그것이 총장실 점거로 이어지고 3학년 때 퇴학으로 마무리된다.
노동이 지옥 같았다
배태선씨는 진짜 노동자가 되기 위해 구미로 간다. 대공장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려고 마음을 먹고 대공장에 입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학을 다녔던 사람은 입사하기가 어려웠다.
"그때만 하더라도 면접 보고 걸러내는 게 너무나 확실해서. 그래서 동국종합전자, 740명 여성 사업장인데 여기 들어갔죠. 노동이 지옥 같았죠."
공장은 조립식 컨테이너 건물이었다. 납땜을 하는 일이었는데 환풍기와 선풍기가 없었다.
"조립식 건물에 여자 아이들을 막 라인에 줄을 쫙 앉혀서 컨베이어 벨트 속도가 18초인데요. 8개씩 막 때워야 되는 거야. 밥 먹고 나면 졸음이 엄청 쏟아지잖아. 컨베이어 속도를 땡긴다. 나 진짜 처음 한 달은…. 두 시간 일하고 10분씩 화장실을 가야 되는데 내 옆에 (물건이) 계속 쌓이니까 (화장실을) 못 가요. 그래서 노동이 지옥 같았거든."
배태선씨는 그 공장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어용노조 위원장과 싸우다가 정체가 탄로 났기 때문이었다.
"파업 끝나고 임금 교섭을 했는데 노조위원장이 자기 임금만 엄청 올리고 여성 노동자들이 요구했던…. 여성 노동자들 겨울 작업복이 필요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걸 남자들한테는 무상으로 제공한다, 여성한테는 반값으로 사라고 회사와 합의한 거예요. 그래서 뚜껑이 너무 열려갖고 우리 라인이 대의원을 앞장세워갖고 쳐들어간 거지. 위원장실에…. 이제 야들이 (내 정체를) 추적을 하기 시작한 거지."
누군가 배태선씨 자취방을 침입해 발자국을 남겨놓았다. 그런 협박을 받고 버틸 수 있는 여성노동자는 없었다. 결국 여섯 달 정도 일을 하다가 나오게 됐다.
그다음에 들어간 회사가 일본 자본이 운영하는 '오리온전자'였다. 컬러텔레비전과 컴퓨터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여기도 다른 사람 이름으로 위장취업을 했다. '차동숙', 나이가 세 살 어린 다른 사람 주민등록증이었다.
여기도 납땜 일이었다. 배태선씨는 일이 너무 힘들어 노조를 만들 생각도 못하고 시간만 흘러갔다. 그 무렵 문송면 사건이 터졌다. 1988년 7월 17살 어린 노동자가 수은 중독으로 사망한 사건이었다. 배태선은 토요일 오후에 기숙사 밖, 평상에 앉아 있던 동료들에게 그 소식이 실린 신문을 보여 주었다.
"'너 이 이야기 들어 봤어?' 근데 본 애들이 있더라고. '세상에 우리가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모르고 살아야 돼?' 그래서 '야, 우리 그러면 신문 읽기라도 한번 해 볼까'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기숙사에서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그 어떤 모임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배태선과 몇몇이 돈을 모아 공장 옆에 방을 하나 구했다.
"'떡볶이방'으로 이름을 지어서 나가요. 그래서 '떡볶이 먹고 싶으면 와라 우리 집으로.' 그게 그다음 해에 '노동조합건설추진위원회'가 되거든."
그 모임 구성원들이 가끔 특근과 잔업을 거부하는 투쟁도 벌였다. 노동조합 결성 추진 모임으로 순탄하게 나아가는 듯했다. 그런데 그 모임에 참여하고 있던 독실한 개신교 신자 한 명이 교회에서 통성기도를 하는 바람에 그 사실이 탄로났다. 그때부터 회사가 이들을 감시하고 기숙사에 잠입해서 물건들을 뒤지고 회사를 나가라고 대놓고 협박을 했다.
"기숙사가 털리고 전체 회의를 합니다. '나가야 된다, 말아야 된다, 니가 빠지면 노조 못한다'라는 노동자들도 있고, '괜찮다. 니 신변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 너 나가도 우리가 책임질게'라고 하는 동지가 있고. 이거 새벽 4시까지 토론을 해요. 그때 제가 처음으로 신분을 밝혀요. '사실은 내 이름이 차동숙이 아니야' 게다가 '나는 대학을 다닌 적이 있어' 뭐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뛰어나가고 울고, 이러면서, 막 난리가 났어요. 여성 사업장 공장은 한 살 차이가 굉장히 빡시거든. 한 살이라도 언니라고 해야 되는 그 당시 분위기는. 그런데 한 살 차이 언니 깍듯하게 했는데 갑자기 언니 캐야 할 상황이 온 거잖아."
기숙사가 털린 것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자기들보다 어린 '차동숙'으로 알고 있던 배태선이 서너 살 위인 언니였다니.
"그래서 야들이 울고 난리 난 겁니다. 무엇보다 '우리 노조 결성 추진 모임이 안전하지 않을 수 있어' 하면서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겠냐'고, '네가 우리와 함께해 줘서 고맙다'고, '네가 안전했으면 좋겠다'고 '우리가 책임지겠다'고…."
배태선은 다시 다른 공장을 찾았다. 이번에는 신분을 속이고 입사하고 싶지 않았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겪은 뒤라 사회가 조금씩 민주화가 되고 있었다. 구미에 있는 공단관리본부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1989년 3월, 당시 스물일곱. 공장에 들어가기에는 나이가 많았지만 '아줌마'들이 주로 일하는 한국IG모터에 입사할 수 있었다. 공단관리본부에서 추천했기 때문에 회사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배태선씨는 처음으로 납땜을 안 하는 공장에서 일했다.
"너무 좋더라고. 2년 다 납땜만 했거든. 그런데 이 공장에서 내가 이제 엄청 당하는데, 오만 걸 다 당합니다. 짧은 시간에."
한국IG모터엔 노조가 없었다. 그 무렵 시급이 2700원이었는데 노사협의회에서 3500원 인상을 결의해서 사업주에게 6200원을 요구했다. 민주화투쟁의 결과로 임금이 전례 없이 많이 오르던 시기였다. 정부가 임금 인상 3퍼센트 가이드라인을 발표할 때였다. 회사에서 순순히 들어줄 리가 없었다. 노동자들은 중식을 거부하며 투쟁했다.
어느 날 같은 라인에서 일하는 '아줌마'가 구미의 유명 식당 '호남무침회'에서 밥을 사 준다고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거기 방 앞에 다른 신발들이 많이 있었다.
"아니 아줌마가 내만 부른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은 왜 부르나 싶더라고. 들어가니까 노동조합 결성 총회를 하더만. 89년 4월 5일 식목일이에요. 이제 앉아서 이야기를 쭉 들었죠."
배태선씨는 노조가입서를 쓰고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이제 교섭 들어가야 된다고 하면서, 교선부장을 (누가 할지) 찾는 거야. 교육하고 선전해야 된다 하니까 부담스러웠을 거 아니에요. 근데 갑자기 저보고 당신이 하래. '제가 왜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니가 여기서 나이가 제일 적대. 여기 있는 아줌마는 애도 키워야 되고 바쁘고. 근데 교육부 선전부장이라 하면 좀 똑똑해야 된다고 들었는데 우리 그럴 수가 없으니 니가 하는 게 좋겠다. 이렇게 된 거야. 그래서 못 한다 안 한다 할 수가 없는 판이에요. 그래서 제가 노동조합의 최초의 직책이 교선부장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들은 배태선씨 소문을 다 듣고 있었다. 그래서 각본에 짠 대로 같은 라인에 있는 여성 노동자가 배태선씨를 부른 것이다.
"근데 교섭을 여러 번 들어갔는데 사장이 갑자기 '내가 계산을 해 봤는데 3500원 올려줘야 될 게 아니라 500원을 까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임금을 왜 올려야 되는지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뚜껑이 열려서 '아니 돌대가리 아니냐, 계산도 못 하냐' 이렇게 된 거예요."
회사는 배태선씨를 해고했다. 해고 사유가 황당했다.
"사장한테 돌대가리라고 했다고. 나중에 지노위 위원들이 그 이야기 듣다가 막 다 웃는데…. 그리고 또 하나는 신분을 속였다, 이거거든요. 그래서 신뢰 성실의 원칙을 훼손했다는데 난 고졸이 맞단 말이지. 속인 게 없어."
노동자들은 회사에 공개 토론을 요구하면서 투쟁을 계속했다. 어느 날 회사가 공개 토론할 테니 식당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일단 들어가야 될 거 아니야 그라고, '아줌마 들어 갑시다 회사가 응한답니다.' 식당 입구부터 약간 조짐이 안 좋긴 했어 과장하고 남자 관리자들이 희한한 눈빛으로 서 있더라고. 그래 이게 무슨 조짐인가, 딱 들어갔는데 밖에서 식당 문을 걸어서 잠갔어."
회사는 그동안에 배태선씨를 빨갱이로 모는 물밑작업을 해 왔다. '배태선 같은 빨갱이들 때문에 공장 다 망하게 생겼다'고 '구사대 깡패'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배태선씨를 잡으려고 했다. 그 젊은이들의 눈빛을 보니 잘못하면 맞아 죽을 것 같았다. 긴박한 순간에 식당 아주머니들이 '도망가' 하면서 테이블하고 의자를 올려서 식당 탈출을 도왔다. 안에서는 아수라장이 됐다. 노동자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과장들이 이제 나를 잡으러 뛰어나와. 공장이 운동장이 꽤 넓거든 죽을 것 같아서 미친 듯이 뛰는데 정문에 딱 도착하니까 못 나가겠더라고. 왜? 아줌마들이 저 안에 있는데 어떻게 나가. 본능적으로 죽을까 봐 뛰긴 했는데 정문에 딱 서니까 못 나가겠다. 공장 안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배태선씨는 다시 공장 안으로 들어간다. 한바탕 난리를 피운 끝에 일하던 아줌마 노동자들이 운동장으로 다 모였다. 그곳에서 배태선은 처음으로 연설을 한다.
"'저는 대학을 다닌 적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나는 진짜 간절하게 여러분들과 함께하고 싶다. 내가 대학을 다녔다는 이유로 내가 이 자리에서 공장을 그만둬야 된다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판단하신다면 내가 그만두겠다. 근데 그것이 아니라면 난 여러분 옆에서 함께 싸우고 싶다.' 그러니까 아주머니들이 박수를 막 치거든요. 그래서 그때부터 그 안에서 철야농성을 해요."
배태선씨는 해고를 당한 채로 노조와 함께 파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배태선씨가 택시에서 내려 유인물을 들고 회사로 들어가는데 웬 오토바이가 와서 그대로 받아버렸다. 배태선씨가 쓰러져 있는데 오토바이 탄 사람이 다가오더니 중얼거렸다. "아, 이 어린 아가씨가 왜 노조를 하냐고." 배태선씨는 그 사람이 한 말을 똑똑히 들었다.
"이게 분명히 배후가 있다고 느껴지고, 그래서 밝혀야 한다. 내일이 파업이잖아. 내가 실려 갔다고 하니 조합원이 엄청 동요하고 그래서. 순천향병원에 있는데 조금 있다가 어떤 젊은 아줌마가 나타나요. 굉장히 어린 아줌마가 애들 한 명을 업고 한 명은 손에 잡고. 그 남자 부인이야. 우리 아저씨 용서해 달라고."
다행히 다리가 부러지지는 않았다. 누워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위원장이 찾아오고 바로 병원에서 나왔다. 자신을 친 오토바이 인부에게도 책임을 더 묻지 않았다.
회사 방해 공작은 치졸했다.
"회사가 문을 다 잠그고 공장 쪽문을 열어 놓고 노조 탈퇴서를 쓴 사람만 들어오게 한 거예요. 아줌마들의 표정이 너무너무 난감한 겁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싱글맘도 많았고 아버지가 아저씨가 남편이 아프신 분들 굉장히 많았거든. 먹고살아야 될 분들이잖아요."
배태선씨는 공장에서 자신을 모함했던 일을 회상하면서 분노한다.
"회사가 공단 일대에 현수막을 붙였습니다. '위장 취업자 배태선은 물러가라' 하고 '배태선 그는 누구인가' 하고 유인물 뿌리고요."(웃음)
그 파업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 경험 때문에 배태선씨는 좌절도 많이 했다.
"사람들이 저한테 가끔 굉장히 비타협적이고 자본에 대한 적개심이 크고, 분노가 많고, 이런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 어릴 때부터 노동조합을 한 거잖아요. 그야말로 맨몸으로 뛰어들어서. 혼자 부딪히고 혼자 돌파한 거죠. 당했던 것에 대한 분노가 굉장히 쌓여 있고, 그리고 그렇게 무참하게 짓밟히고... 그런 게 다 겹쳐져서 내가 분노를 너무 잘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