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육과 함께하는 겉절이는 꿀맛이었다.
오지영
그 많은 김치를 나와 외할머니, 친정에서 일 년이면 다 해치운다. 항상 밥상에 김치가 올라온다. 김치는 정말 효자 반찬이다.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김치전, 김치찜 등 많은 음식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가족 중 가장 김치를 사랑하는 아빠는, 그냥 먹는 김치가 최고라고 하신다.
어릴 적, 김장 김치가 유독 맛있게 익었던 어느 해 겨울이 생각난다. 나는 방학 동안 동생과 함께 집 근처 작은 미술학원에 다녔다. 늦었다고 신발을 구겨 신으면서도 엄마를 향해 외쳤다.
"엄마! 오늘 점심도…."
"알았어. 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 와."
미술학원에 간 동생과 나는 점심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졌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누구보다 재빠르게 학원을 나섰다. 차가운 겨울 바람을 헤치며, 소복이 쌓인 눈을 씩씩하게 밟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집 현관문을 여니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나와 동생은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식탁 위에는 김치찌개와 계란말이가 놓여 있었다. 뚝배기의 열기로 여전히 바글바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는 소리로, 냄새로 우리를 사로잡았다. 물론 맛은 더 기가 막혔다. 엄마 말로는 우리 자매가 한 달 내내 그 김치찌개만 점심으로 먹었다고 했다. 그 해 김장 김치는 순식간에 동이 났다.
결혼한 후에도 몇 번 김장을 도우러 갔다. 그러나 아이들이 태어나고, 사는 지역이 친정과 멀어지면서 나는 김장 동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몸은 편한데, 마음은 불편했다. 가족들 모두가 고생하는데 날름 김치만 얻어먹는 기분이었다.
올해 김장철에도 전화를 드렸다. 이번 김장엔 가겠다고 입을 열었더니, 엄마가 절대 오지 말란다. 아이들도 춥고, 집도 정신없다고. 당일 저녁이나 다음 날 아침에 김치만 받으러 오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 날, 다시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혹시 김장 날 좀 더 일찍 올 수 있냐는 전화였다. 일손이 부족한가 싶어서 냉큼 알겠다고, 몇 시까지 가면 되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그게 아니란다.
"김장 도와 달라는 건 아니고. 그날 겉절이에 보쌈 먹을 건데 어때? 막걸리도 사다 놨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입에 침이 싹 고였다. 알겠다고, 무조건 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올해 김장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느린 손으로 유명했던 여동생이 날이 갈수록 손이 빨라지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었다. 그날의 메뉴는 엄마가 예고한 대로였다. 김치와 함께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수육이 식탁 위에 등장했다.
겉절이는 아직 양념이 다 배지 않아서 다소 삼삼했다. 하지만 시원했다. 김치를 길게 찢어서 따끈따끈한 고기 위로 둘둘 말아 입 안에 넣었다. 온 가족이 맛있다고 난리였다. 엄마는 겉절이를 먹으며 올해 김장 김치 맛이 어떨지 가늠해보셨다. 엄마 말로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