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이모를 위해 호박죽을 끓였습니다

등록 2022.12.08 15:01수정 2022.12.0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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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이 있다. 사랑은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말일 게다. 즉,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긴 해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긴 좀처럼 어렵다는 뜻으로 보통 부모 자식 간에 쓰이는 말이지만, 어디 부모 자식 간에만 내리사랑이 있을까. 내게 내리사랑은 조카들이다. 나는 조카들을 물심양면 꽤나 사랑했다. 조카들이 달라고 한 적 없으니 짝사랑이다. 부모가 그렇듯 나 역시 조건 없는 사랑이라 해두자.


어린 조카들이 하나둘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되어도 내 사랑은 변함이 없는데 어느 순간 서운할 때가 있다. 기념일에 할머니 선물만 사 올 때다. 용돈은 나한테도 받으면서 왜 내건 안중에도 없는 걸까. 소외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내색하는 순간 생색이 되어버리니까 티는 내지 않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서운함이 익어간다. 나이가 들었는가 보다. 짝사랑이 원래 저 혼자 애타는 것이지만 이젠 이 짝사랑을 어느 정도 접어야 내 맘이 편한 것임을. 뭐든 접어야 편하다. 그리고 이제 겨우 스물 밖에 되지 않은 조카들에게 기대를 하는 건 내 욕심이다.    

"얘야, 넌 조카들만 챙기지 말고 나도 좀 챙겨봐라." 평생 말씀 없던 엄마가 어느 날 내게 하신 말씀이다. 그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거처럼 얼떨떨했다. 매주 어린 조카들과 맛난 거 먹고 다니면서 정작 같이 살고 있던 엄마 하곤 한 번도 외식을 한 적도 맛난 걸 사다 드린 적도 없다. 아니 사다 드릴 생각조차 못했으니 얼마나 서운했을까.

그 말을 듣기 전까진 나는 정말 한 번도 엄마를 안중에 두지 않았었다. 엄마 입을 통해 그 마음이 나올 때까지 그 속은 얼마나 까맣게 탔을까. 엄마는 음식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안중에도 없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나 지금 괜찮지 않다고, 하나도 안 괜찮다고.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시그널을 보내셨음에도 눈치채지 못하고, 엄마는 늘 괜찮은 존재라고 착각했다. 엄마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엄마도 괜찮치 않음을, 사람임을 알게 된 그때, 내 나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그 나이 먹도록 그거 하나 몰랐으면서 어린 조카들에게 서운함을 운운하는 건 염치도 없는 짓이다.

해마다 이맘때쯤 내 생일이면, 엄마는 늘 한상을 차려주었다. 시집도 안 간 딸 뭐가 예쁘다고 떡까지 한 시루 직접 쪄서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번거롭게 뭣하려 하냐고 괜히 투덜대지만 엄마는 내 투덜거림을 무시하고 매해 생일 아침마다 과할 만큼 큰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말려도 매번 그렇게 해주셔서 어느 해부터는 떡 만드는 걸 거들기로 했다. 엄마는 매우 즐거워하셨다. 내가 독립하기 전인 마흔 살까지 엄마는 생일상을 꼭 그렇게 어김없이 정성껏 해주셨다. 한 번도 잊지 않았고 귀찮아하지도 않으셨다.


독립한 후론, 택배로 생일상을 보내오신다. 미역, 잡채, 생선, 고기, 국수까지 살뜰히 챙겨 엄마가 해주셨던 음식 재료들 그대로 보내오신다. 그 마음으론 부족했는지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봉투 속에 용돈도 보내오신다. 어느 순간은 부끄럽기도 하고 또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한다고 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치사랑이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올해도 엄마는 그렇게 생일상을 보내오셨다. 그리곤 내가 잘해 먹었는지 전화를 걸어왔다. "이젠 내가 엄마보다 미역국을 더 잘 끓이는 것 같아. 잡채도 엄마보다 훨씬 맛있어"라고 자랑하자, 엄마는 '그럼 그래야지' 하면서 '이젠 네가 요리를 잘하는구나' 하셨다. 가까이 사는 막내 이모는 나를 걱정하는 엄마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을 시키곤 하셨다.

막내 이모는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어리다. 장녀인 엄마와 막내인 이모와 나이 차이가 있다 보니 서열이 그렇게 되었다. 나이보다 서열이 우선시 되다보니 어릴 때부터 이모는 나이가 어려도 늘 우리를 챙겼다. 어른처럼. 지금까지도 그렇다. 특히 나는 막내 이모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는다. 같은 지역에 살다 보니 이것저것 살뜰히 챙기고 해마다 농사지은 고구마를 한 박스씩 챙겨줘 겨울 내내 먹을 양식이 된다.

교사인 이모는 교사다운 말투로 언제나 다 큰 나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곤 한다. 오늘도 날씨가 춥다며 잘 입고 다니라며 싱거운 안부를 한다. 나이 든 조카와 이모가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 카톡에 뜬 내 생일을 확인했다며 피자와 치킨을 사주셨다. 독감이 유행이라며 몸에 좋은 홍삼도 주셨다.

엄마가 너도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이모에게 받지만 말고 답례하라고 늘 얘기하지만, 촌스럽다며 듣지 않았다. 새삼 이모가 챙겨주는 것들이 마음에 와닿은 건, 생일날 늦은 저녁 대학생 조카가 기념으로 보내온 밀크티 쿠폰 한 장에 밤새 '심쿵'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어른들이 시켰나 하는 의심을 품고 언니에게 슬쩍 떠봤는데 언니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조카 자의라면 정말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너무 좋아서 솜사탕처럼 달콤한 밀크티를 당장이라도 사 먹고 싶었다.

내가 어린 조카들에게 바라는 건 당연한 거고, 이모에게 주는 건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건 무슨 심보였을까. 가진 게 많은 이모라고 생각해서 한번도 뭘 제대로 줘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나이 먹도록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이기적인 나를 행복한 개인주의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앞만 보지 말고 좌우를 살피며 조화롭게 사는 게 세상사는 이치겠지만 나는 언제쯤 엄마 바람대로 철이 들 수 있는 걸까.

나는 나의 심쿵이 이모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모가 좋아하는 호박죽을 쑤기로 했다. 엄마가 보내주신 누런 떡 호박. 수박보다 더 큰 그 호박을 썰어 끓여 마침내 호박죽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퇴근길에 호박죽을 가져가라고 했다.

이모는 상기된 목소리로 "어머나! 그거 끓이기 힘든데... 고무장갑 끼고 해야 돼, 안 그럼 튀어서 손 다쳐"라고 말했다. "응, 그지 않아도 엄지손가락 데였고, 검지손가락에 물집 터졌어"라고 말하자 깔깔 웃었다. 역시 치사랑은 힘들다. 이렇게 생색내고 싶어 하는 걸 보면 확실하다. 
    
난생 처음 만들어본 호박죽. 요리왕들이 알려주는 다양한 레시피로 몇 번 연습을 했고, 그중 가장 식감이 좋았던 엄마의 요리법으로 이모에게 줄 호박죽을 한 냄비 끓였다. 눌지 않게 국자를 돌리면서 건강식을 좋아하는 이모를 떠올렸다. 호박죽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을 이모를 생각하니 내 마음도 괜스레 두근두근 설레었다. 설마 이모도 밀크티 쿠폰 받았을 때 나처럼 심쿵한 건 아니겠지 별생각 다 든다. 그리고, 이제 내 나이쯤엔 치사랑에 더 신경 쓰는 게 맞는 거 같다. 더 늦기 전에, 그래야 공평할 거 같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엔 엄마에게 호박죽을 만들어 드리겠다고 하자 엄마는 "난 괜찮다"라고 하셨다. 이모에게 준 호박죽 맛을 걱정하자 "맛은 괜찮아, 그 마음이 중요한거지. 이모도 알 거야"라고 흐뭇해 하셨다. 마음을 알아주는일, 엄마가 괜찮다고 하셨지만, 엄마를 위해서도 호박죽을 끓일 것이다. 엄마가 내게 해줬던 것처럼 엄마를 심쿵하게 만들고 싶다.
#호박죽 #내리사랑 #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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