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속에서 생사를 오가다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충주 목사의 외면

등록 2022.12.16 08:56수정 2022.12.16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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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나는 1884년 12월 9일 눈보라속에서 60리길을 갔습니다. 문경새재를 넘어 오후에 주막에 들었지요. 날이 밝자 먼저 전양묵을 충주 관아로 보냈습니다. 9시가 좀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전양묵의 미션은 충주 목사를 만나 우리 일행의 방문을 알리고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갑신정변으로 안전이 위태로워졌으므로 충주 관아의 도움은 절실했습니다. 숙식도 그렇지만 노잣돈이 가장 큰 걱정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중에 늘 행선지의 관아에서 여행 비용을 차입하여 사용해 오고 있었는데 이제 여비가 거의 다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으면 당장 주막의 숙식비, 열두 명이나 되는 가마꾼을 비롯한 일꾼들의 일당을 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나는 위험 인물, 기피 인물 혹은 처치의 대상이 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에 충주 목사가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할지가 은근히 걱정되었습니다. 
  
주막을 나서니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괴이한 정적 속에서 우리는 눈이 쌓인 언덕길을 헤쳐 나갔습니다. 11시 쯤에 두 대의 가마와 함께 이동하는 십여명의 행인을 마주쳤습니다. 우리는 궁금하여 "어디 가십니까? 어디에서 오십니까"라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습니다. 다시 물었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이내 가파른 고개길이 나타났습니디. 빙판길이어서 올라가기가 극히 어려웠습니다, 온 힘을 짜내는 듯한 가마꾼의 신음 소리에 나는 몹시 고통스러웠습니다. 가도가도 첩첩 산중이었습니다. 정오쯤에 오륙십명이나 되는 피난 행렬을 만나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가마는 다섯 기였고 말이나 소도 보였습니다. 치마를 뒤집어 쓰고 짐을 머리에 이고 있는 세 명의 여인의 모습에서 기묘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용인의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오후 2시 반경에 주막에 들었습니다. 거기에서 충주는 20리 거리였습니다. 충주 목사를 만나러 간 전양묵의 소식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경숙(일꾼)이에게 나가서 전양묵을 찾아 보라고 했습니다. 곧 나타난 전양묵이 전한 소식은 참담했습니다. 목사를 만나려 관아에 들어갔으나 면담을 거절당했다는 것입니다.

아전이 나와서 하는 말이 목사가 몸이 광장히 아파서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양묵은 목사에게 보내는 나의 서류를 아전에게 전했답니다. 그것을 받아본 목사는 5천 푼을 사용할 수 있는 신용증서를 아전를 통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를 만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암담해졌습니다. 5천푼은 턱 없이 부족한 액수인데다, 목사가 나를 기피한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기 때문입니다. 불길한 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주막 마당으로 쏟아져 들어와 무례하게 나의 방문을 열어젖혔습니다. 그들은 다짜고짜 내게 뭐하는 사람이냐, 진짜 미국 장교가 맞느냐, 그렇다면 계급은 뭐냐... 큰 소리로 추궁했습니다. 술에 취한 아전 한 명이 내 방으로 난입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전양묵과 정수일이 가까스로 말렸습니다. "왜놈wai-nom일지 몰라, 끌어 내야 해", "아니야, 아닌  것 같아" 그런 소리들이 마당으로부터 들려 왔습니다.


수일이 다급한 어조를 말했습니다. "빨리 여길 빠져 나가야 해요. 큰 일 나겠어요" 우리는 가까스로 그곳을 빠져 나왔습니다. 나나 일행 중에 누가 살해 당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겁에 질린 두 명의 가마꾼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남아 있는 두 명의 가마꾼들도 겁에 질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북서쪽으로 황급히 이동하여 얼어붙은 강을 건넜습니다. 강바닥이 쩍쩍 음울한 소리를 토했습니다. 강을 건넌 후 한적한 주막에 이르렀는데 술취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이르자 우리 가마꾼들이 매우 거칠게 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나를 버리고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쳤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같이 이동했고 이내 가축 우리같은 곳에 들어갔습니다. 

양묵과 수일 그리고 나, 이렇게  우리 세 사람은 협소한 방에 구겨지듯 들어갔고 가마꾼들도 다른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 우리 같은 곳에서나마 휴식을 좀 취하고 있는데 이내 안 주인이 나타나 울면서 말하기를, 지금 양반nyangpan이 나타나 당장 방을 하나 내놓으라고 하여 가마꾼들의 방을 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추운 밤중에 어디를 간다는 말이오?" 격한 말다툼이 일어났지만 우리는 결국 횃불잡이 소년을 한 명 구해 길을 나섰습니다. 다시 10리 길을 간 뒤 겨우 주막을 찾았습니다. 거기에서도 우리 셋은 작은 방 하나에 들어갔습니다. 주막 여주인은 몹시 싹싹하였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잘 들어주었습니다.

우리 옆 방에서는 사람들이 서울의 사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내가 이방인임이 노출되면 위험하다고 여긴 양묵과 수일은 나를 숨기고 가렸습니다. 그리고 날더러 조선 옷으로 위장하라고 권했습니다.

밥이 들어 왔습니다. 오늘 아침 이후 첨 보는 밥이지만 식욕이 없었습니다. 억지로 몇 술을 떴지요. 그러고 있는데 충주 목사가 보낸 관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목사가 그들에게 내린 훈령을 지참하고 왔습니다. 훈령은 미국 장교가 어디에 있는지, 숙소는 잘 잡았는지 등을 살피고 보고하라는 요지였습니다.

목사는 나를 뜨거운 감자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였습니다. 정양묵에게 부탁하여 목사 앞 서한을 작성하여 건넸습니다. 내가 조선에 오게 된 경위, 현재 처한 곤경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충주의 한 아전으로부터 끔찍한 서울 사태에 대해 들었습니다. 나는 양묵과 수일에게 나를 위해 싸우지 말고 자신을 돌보라고 일렀습니다. 만일 최악의 상황에 처하면 나를 떠나 처자식을 돌보기를 원한다고 밝혔습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조지 포크 #갑신정변 #충주 #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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