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퐁 거리
Widerstand
중국에서는 1870년대 해군을 강화해 동남쪽의 바다를 방어할 것인지, 육군을 강화해 서북쪽의 초원지대를 방어할 것인지를 두고 큰 논쟁이 일었습니다. 동남쪽에서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 세력과 일본이 침략을 가속화하고 있었고, 서북쪽에서는 야쿱 벡의 난을 비롯한 각종 반란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요.
여기서 해군을 강화하자는 측을 '해방(海防)'론, 육군을 강화하자는 쪽을 '새방(塞防)'론이라고 부릅니다. 해방론의 선두주자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이홍장이었고, 새방론의 선두주자가 좌종당이었습니다. 이것을 '해방-새방 논쟁'이라 부르고, 이를 배경으로 성장한 북양함대는 이홍장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 되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도 '해방'은 아주 중요합니다. 일본은 이른 시기부터 러시아의 남하를 마주하며 바다를 통한 서구 열강의 침입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1792년부터 막부의 가장 높은 관료인 로주(老中)들 가운데 '해방괘(海防掛)'라는 직책을 만들어 바다를 방어하는 일을 전담하는 관료를 두었습니다.
임시직이었던 해방괘 로주는 1845년부터 상설화되었고, 로주 뿐 아니라 막부의 핵심 직책인 메츠케(目付) 등에도 해방괘 자리가 설치됩니다. 에도막부 후기 개혁정책을 추진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 등이 모두 이 해방괘 로주 출신입니다.
물론 병인양요나 제너럴 셔먼호 사건, 신미양요 등 서양과의 충돌을 맞이했던 조선에서도 해방(海防)에 관한 논의는 있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했던 박규수 등이 대원군에게 해방에 힘쓸 것을 상소하기도 했지만, 크게 힘을 쓰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