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중 화백.
최방식
"깨달음이 깊은 사람에겐 법이 필요 없는데, 그렇다고 법이 없는 게 아니라는 석도(石濤)의 말에 꽂혔죠. 근본을 꿰뚫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림의 가치를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구현하는 데 있다는 걸 가르치죠. 막막하던 미술학도에게 '길'을 보여준 것이었어요."
손기술이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는 그림이 가치가 크다는 걸 터득한 것. 학교의 미술교육이 되레 창작예술을 옥죈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석도의 '지인무법'(至人無法)은 화풍이나 화단 틀에 얽매이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던 것.
장자는 소요유(逍遙遊)편에서 지인(至人, 도를 깨달은 이)은 자기가 없다고 했다. '잔잔한 물(또는 거울)'과 비교했다. 물이 잔잔하고 맑음을 유지하려면 더러운 게 섞이지 않아야 하고 막히지도 않아야 하듯이. 거울에선 잘나고 못난 거 따질 리 없고 사물 그대로를 담아낼 뿐이니 상할 일이 없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는 대만 유학을 마치고 산수화를 그려 대학 시절 인연이 있는 교수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호통뿐. '이놈, 중국 가서 공부한 게 중국 냄새뿐이냐.' 깨달음을 그림에 담지 못했다는 지적에 화들짝 놀란 것이다. 30대를 앞둔 때다.
고심 끝에 벽화를 선택했다. 금호미술관과 수묵화 개인전을 약속했는데 생각을 바꿔 벽화로 나갔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국제갤러리와 일본 켄지다키갤러리(도쿄) 전속작가를 꿰찰 수 있었다. '2000년대 새 작가' 기대주 1위(신동아, 평론가와 기자 상대 설문, 1990년대 중반)로 뽑히기도 했다.
"고구려나 둔황(중국) 벽화와 같은 재료를 사용했죠. 내용은 벽화 형식을 차용한 추상화였고요. 포스트모던 작품이랄까. 국내에서는 생소해 관심을 가졌을 거예요. 그 덕에 10여 년 잘나갔죠. 하지만 형상을 계속 만들어내는 게 어려웠어요. 한계에 봉착한 거죠."
실화→추상화→단색화, 구도의 길
10년 만에 그림을 바꿨다. 처음엔 '단색조 벽화'였는데, '이게 무슨 그림이냐'(형상이 없다보니)는 혹평과 그에 따른 경제난 우려로 그만뒀다. 그 뒤 전통민화를 현대적 재해석(말풍선 애드벌룬 등을 가미한)한 꽃그림을 선택했고, 그걸로 10여 년을 버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