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지초당김정희가 기거했던 한옥으로서 추사박물관 앞마당에 조성되었음.
이상헌
박물관 바로 앞에 노년의 추사 김정희가 머물렀던 과지초당(瓜地草堂)을 복원해 놓았다. 단촐한 한옥에 추사의 동상이 서 있고 또 자그마한 연못이 자리한다. 아버지 김노경이 세상을 뜨자 김정희는 옥녀봉 중턱에 부친의 묘를 안치하고 3년상을 치렀다고 전해진다.
힘든 시절에 자신을 갈고 닦아 눈부신 업적을
추사는 조선 왕실의 외척(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증손주)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솜씨가 남달랐다. 젊은 시절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의 영향을 받아 학문에 힘을 쏟는다. 24세에 과거(생원시)에 급제하였고 청나라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를 수행하여 40일간 연경(베이징)에서 머문다. 이 시기에 융성한 청나라 고증학을 접하고 당대 지식인과 소통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한다.
조선으로 돌아온 뒤에도 청나라의 대학자 옹방강(翁方綱)과 서편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이어나간다. 삼십대에는 북한산 비봉에 세워진 비석이 '진흥왕순수비'임을 고증하며 눈부식 업적을 쌓는다. 병조와 이조참판을 역임하는 가운데 윤상도의 옥사가 발발하여 9년 동안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 맑은 물 흐르는 청계산에서 추사의 자취를 보다 ⓒ 이상헌
윤상도는 고위 관료의 비리를 고발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임금과 신하를 이간질 한다는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이 상소문을 쓰는데 김정희가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가 활동하던 조선 말기는 안동 김씨가 매관매직을 일삼던 시절이라 귀양살이가 끝난 뒤에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과천에서 생을 마감한다.
19세기 조선이 낳은 천재 지식인이자 실학자이며 서화가로서 그의 걸작품인 세한도가 제주도 유배시절에 그려진다. 힘겨운 유배생활을 하면서 추사체라는 독보적 글씨도 이때 큰 변화를 일으켜 역사에 굵은 필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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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산 오르기 전 추사 김정희를 알고 가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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