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정기의 전당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에 놓인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비문
김성호
독립투사 기념관 앞 친일파 글씨라니
며칠 전 나는 추운 겨울날 찾은 안중근의사기념관 앞에서 한참을 멈추었다. 그건 이 자리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 무엇이 이곳을 찾는 이의 눈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문 앞에 3미터는 족히 될 높이에다 가로로는 그 두 배쯤 되는 거대한 자연석이 누웠는데, 여기 새겨진 글씨가 대통령 박정희의 것이 아닌가 말이다.
'民族正氣의 殿堂(민족정기의 전당)'이라 쓰인 글씨는 소위 '사령관체'로 그 아래에 '1979년 9월 2일 大統領 朴正熙(대통령 박정희)'라 적혀 있었다. 안 의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직접 쓴 글자를 그대로 새긴 것인데, 집권 기간 동안 성웅 이순신을 매개로 국민 통합의 효과를 보았던 정권에서 안중근을 눈여겨 본 것이란 의견이 나올 즈음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박정희 대통령은 그 해를 넘기지 못했고 안중근은 오늘에야 한국사회의 집중조명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문제는 박정희의 친필 글씨가 말 그대로 민족정기가 흐르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에 놓일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경제적 성공의 기반을 닦았다는 공적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독재자란 역사적 평가는 물론이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국 육군 장교로 근무한 이이력이 독립투사 기념관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탓이다. 그는 대통령 박정희이기도 했지만 독립군을 뒤쫓던 다카키 마사오이기도 했다.
죽은 독재자에 기대어 제 명을 연장하려 드는 못난 정치인들이 혈세를 들여 기념관을 짓고 기간시설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야 오늘의 한국을 돌아보면 막을 수는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익 앞에서 의를 생각하라'는 <논어>의 정신을 첫 계명으로 여기고 살다 간 안중근 의사 앞에 만주국 군관 출신 대통령의 글씨가 서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민족정기의 전당 박정희 글씨로 새겨진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 비문.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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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기념관 앞에서 박정희 글씨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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