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 피의 흔적>(임도혁, 이화, 2022)조광조 유배지 - 애우당에 걸린 편액 ‘절명시’.
김민지
기묘사화하면 조광조는 알아도 양팽손, 최산두는 모른다. 후일 화순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양팽손과 최산두다. 그의 시신을 거둔 양팽손과 화순 8경 중 제1경을 적벽이라 지은 최산두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역사적 깊이가 얕은 탓도 있으리라.
중종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지만 한 일이 없었다. 우유부단했지만 판세를 잘 읽었다. 나름의 처세술이 뛰어나다. 정국이 혼란할 때 중종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조광조'가 나타난다.
왕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겨울 따뜻한 곳은 정신이 흐트러진다며, 추운 사정전에서 경연했다. 지엄한 왕도 꼼짝 못할 조광조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자신보다 더 추앙받는 조광조가 두려웠다. 전폭적으로 밀어줬던 사림을 내친다. 1519년 개혁을 추진하던 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이 '기묘사화'이다.
100명이 넘는 이들 중 12명에 한정시켜 <기묘사화, 피의 흔적>에 소개했다. '사림 천하 이렇게 만들었다'라는 부제가 붙었다. 기묘사화에 대한 인물 관련 유적지와 후손들의 인터뷰를 소개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정암 조광조, 학포 양팽손, 충암 김정, 눌재 박상, 사제당 안처순, 사암 김구, 사서 김식, 신재 최산두, 그리고 소쇄옹 양산보, 하서 김인후, 모재 김안국, 금헌 이장곤이다. 중종의 뜻을 알아채고 해결사로 나섰던 '기묘삼흉(己卯三凶)'인 지정 남곤, 소요정 심정, 홍경주의 이야기까지 실려 있다.
화순은 기묘명현의 고장이다. 세 사람이 이곳으로 왔다.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10년 넘게 유배 생활을 했고, 한 사람은 은거(隱居)했다. 조광조, 최산두, 양팽손이 그들이다. 능성 현(능주면)으로 유배 온 조광조, 동복 현(동복면)으로 온 최산두, 파직 당해 도곡으로 온 양팽손.
정암은 자신의 죄목도 모른 채 왔으니 많이 억울했을 것이다. 유배 생활 내내 돌아갈 수 있길 바라며 25일 동안 해배(解配) 소식을 기다렸다. 먼지를 일으키며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기다리던 어명이다. 임금이 그에게 죽음을 내렸다. 선비의 뜻을 모두 펼치지 못한 처절함을 절명시(絶命詩)로 남기고 사약을 마셨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하였노라.
밝은 해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거짓 없는 이내 충정을 환하게 비추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