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 지사형 정치인 서민호가 설 땅은 대단히 비좁았다.
""그는 너무나 청렴·결백·강직하고 아집이 센 정치가" (주석 1)였기 때문이다. 폭력주의 바탕에 권모술수와 마키아벨리즘이 난무하는 1960년대 한국적 정치풍토는 민주사회주의 이념과 청교도 성향의 서민호가 세력을 키우고 이상을 구현하기에는 너무 고루하고 척박했다.
그는 매사에 철저한 성격이었다.
공사간에 대충 넘어가거나 적당히 해치우는 일이 없었다. 1969년 9월 13일 3선개헌을 반대하여 야당 의원들과 국회에서 농성을 할 때 이날 밤 11시 30분경 졸도하여 한일병원으로 이송하였다. 여러날 동안 철저하게 단식을 결행한 때문이다. <나의 습벽(習癖)>이란 단편에서 자신의 습벽을 기술하고 있다. 많은 것을 상징한다.
나의 습벽
나는 좋으나 나쁘나 한번 시작한 일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해치워야 속이 시원한 습벽이 있다. 그러므로 정월 초하룻날 작정한 마음은 섣달 그믐 날까지 버리지 못하고 완전히 해치우는 것이 나의 버릇이라 하겠다. 이렇게 시종일관 그 일에 몰두하는 것이 성질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기도 한데 평소에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졌다가도 어쩌다 곤경에 처했을 때는 마음이 아주 냉정해 진다.
해방 후 좌익분자들과 투쟁했을 때에도 나의 신변은 아주 위험했었고 자유당과 투쟁했을 때에도 생명의 위협을 받아 왔지만 철석같은 나의 민주주의 신념은 한 번도 굽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나의 불굴의 신념은 내 생활의 전부이며 8년이란 긴 세월을 옥중에서 고생한 적이 있었다. 이 8년간의 옥중 생활에서 또 하나의 습벽이 생겼는데 그것은 아침 5시에 기상하는 버릇이다. 그래서 나는 4.19혁명의 덕택으로 형무소에서 나온 후에도 지금까지 저녁에 아무리 침실에 늦게 들어갔어도 아침 5시면 꼭 일어나는 버릇이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인왕산 꼭대기까지 등산을 하는 것이 나의 일과인데 이 운동은 건강에는 물론 심신단련에도 가장 좋은 방법이라 하겠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2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등산을 계속하는 동안 하이커가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쾌감을 발견하였다. 여명에 산정에 올라가서 장안을 굽어보는 형언할 수 없는 그 쾌감! 전장에서 귀성하는 개선장군보다 우월해진다.
시를 짓기 위한 영감을 얻으려고 로마시를 불사르고 시령을 얻었다고 좋아서 날뛴 폭군 네로의 잔인성도 회고해보고 독일국내에 종교를 말살하기 위하여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5백만의 유태인을 학살케 한 히틀러의 폭정도 또한 희고해 본다.
그러다 보면 4.19때 수10만의 학생 데모대가 시가를 시위하며 육박해 왔을 때 경무대에서 내다 본 이박사의 심정이 어떠하였으리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겨 보기도 한다.
독재자의 말로란 결국 네로나 히틀러가 더듬은 말로와 비슷한 것이라고 느껴보는 것이다. 사람은 정치가이든 사업가이든 그의 무슨 일을 하든간에 자기의 양심과 신념을 지키고 옳은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은 결국 따지고 보면 좋은 습벽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주석 2)
주석
1> 정구영, 추천사, <뜻 있는 동지들에게 충격과 공감준다>, 서민호 지음, <이래서 되겠는가>, 환문사, 1969.
2> 서민호, <이래서 되겠는가>, 353~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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