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신문
1944년 소안 미라마을에서 태어난 신씨는 두 살 때 가족들과 부산으로 이사 갔다가 18세 때 다시 소안으로 돌아왔다. 미라리 마을은 평산신씨(平山申氏)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미라8경으로도 유명하다.
"인자는 바다도 쓰레기가 너무 많고 오염이 돼서 물질을 하여도 예전 같지 않고 힘만 듭니다. 정말 큰일이에요! 물이 돌아나가는 곳에는 어김없이 쓰레기가 가득합니다."
신덕순 해녀의 첫마디는 의외로 심각한 바다 쓰레기 이야기였다.
- 해녀는 어떻게 하게 됐는가?
"부산에서 돌아와 18세때 러닝셔츠만 입고 마을 앞에서 수영했다. 그러다 물질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는 마을에 제주에서 출가물질 온 해녀뿐만 아니라 해녀들이 여러 명 있어서 물질을 배우기가 쉬웠다."
해녀 3총사의 어장은 미라마을 주변이 주어장이지만 인근 불근도, 보길도, 예작도 등 주변이 다 물질이 가능한 바다라고 한다. 일은 마을 어촌계 일과 개인 일로 나눠지는데 어촌계의 경우 마을에서 배를 대주고 마을에서 6 해녀들이 4로 배분한다고.
일은 물때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하루에 4시간 정도를 한다고 한다.
주로 잡는 것은 전복, 소라, 성게다.
"옛날에는 바다 속에 들어가면 해산물이 엄청 풍부했다, 그러나 지금은 바다가 너무나 황폐화돼 성게는 많이 사라졌고 자연산 전복도 옛날 같지가 않다."
- 물질을 60년 정도 했는데 물질하기 전 긴장은 어떻게 푸는가?
"사실 물속은 같은 바다라도 날마다 다르다. 우리는 어장이 주로 마을 주변이어서 배를 타고 가며 농담을 많이 한다. 웃고 떠들면 금방 어장에 도착하고 긴장이 풀린다. 긴장이 풀리면 물질이 한결 수월하고 좋은 물건(자연산 전복)도 눈에 잘 보인다. 반대로 긴장이 풀리지 않으면 물질이 어렵다. 젊었을 때는 체력이 좋아서 물질이 끝나면 그날 잡은 가장 큰 전복을 배에서 썰어 소주를 마시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했다."
- 결혼은 언제 했는가?
"같은 마을에 사는 남편을 19살에 만나 20살에 결혼하고 21살에 첫 딸을 낳았다. 그때는 연애도 아니고 중매도 아니고 같은 마을에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신랑은 소안수협에서 근무하고 퇴직했다."
신씨는 광어양식장을 시작, 고기가 잘 크고 있었는데 적조가 한번 들어와 고기가 모두 폐사하는 바람에 돈은 벌지 못하고 빚을 많이 졌다. 이제는 모두 갚았다고 한다.
또 요리솜씨가 좋아 텃밭에서 직접 키운 채소를 사용해 마을 식당을 8년 정도 운영했는데 나름대로 장사가 잘 됐다고 한다. 그러나 몇 년 전 힘에 부쳐 식당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 물질을 하면서 생명에 대한 고비는 없었는가?
"몇 해 전에 머구리를 한번 한 일이 있는데 선외기가 에어호스을 끌고 가서 죽는 줄 알았다. 그러나 소리쳐서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 이후에는 머구리를 절대 안한다."
- 60여 년간 전복을 잡았는데 전복은 어떤 요리는 해야 맛있는가?
"나는 전복보다 소라를 더 좋아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해녀들은 전복의 경우 첫 번째는 회, 두 번째는 죽, 세 번째는 구이를 맛있다고 생각한다."
- TV에도 여러 번 출연했는데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는가?
"많은 방송을 촬영했다. <한국인의 밥상>을 비롯해 이만기씨가 기억에 남는다. 첫 출연료로 5만 원을 받은 것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글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유영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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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면 미라마을 해녀 3총사의 왈가닥 언니 덕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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