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초 주안 소금밭1907년 천일제염 성공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소금밭이 되었다. 주안 소금밭의 영향으로, 일제시대 인천 해안가 간석지가 모두 소금밭으로 변한다.
인천시청
인천을 왜 이렇게 부르게 되었을까. 소금밭 때문이다. 지금은 도시와 산업단지로 변모한 곳곳이 소금밭이었다. 1907년, 천혜의 간석지 주안에 1정보(약 3천 평)로 천일제염이 시도된다. 토판염이다. 그전까지는 바닷물을 가마솥에 끓여 소금을 얻었기에,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소금값이 비싼 이유 중 하나다. 천일제염은 대량생산이 가능한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실험은 대성공을 거둔다.
일제가 서해안 소금에 눈독을 들인다. 미네랄이 풍부하여 품질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일제는 대한제국에 차관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주안 소금밭을 넓혀간다. 1정보가 2년 후 88정보가 되더니 212정보까지 넓혀진다. 지금의 북항에서 갯골 따라 십정동까지 이어진 양쪽 넓은 산업단지가 모두 소금밭이었다.
1921년 지금의 남동공단 자리엔 300정보가, 군자 소금밭은 1925년 575정보로 시작해 603정보까지 넓혀진다. 당시 전국 천일염 생산량의 21%를 이 3곳 소금밭에서 생산해낼 정도였다. 소래포구가 품고 있던 간석지에도 소금밭이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