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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놓고 뒤섞인 모스크와 성당, 그리고 중국계 사원

[말레이시아] 국경 남쪽의 풍경

등록 2023.02.21 15:40수정 2023.02.2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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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서 국경을 넘었고, 농카이에서 열 시간을 넘는 버스 여행 끝에 다시 방콕에 닿았습니다. 방콕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열두시간 버스를 타면 드디어 태국 남부 푸켓에 도착합니다.

푸켓에서 이틀 동안 휴식을 취한 저는 다시 남쪽으로 달려 태국 핫야이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이면 말레이시아로 가는 국경입니다. 닷새 동안 남쪽으로 달려 태국을 가로질렀고, 말레이시아에 도착한 것입니다.


육로 국경이라는 것이 늘 그렇지만, 이번에는 특히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우선 종교가 바뀌었습니다. 태국은 공식적으로 서기가 아닌 불기 연호를 사용하는 국가입니다. 태국 어느 도시의 호텔에서 영수증에 쓰인 "2566년"이라는 표현을 보고 순간 당황했던 경험도 있었습니다. 반면 말레이시아는 이슬람 국가입니다. 국경에서부터 히잡을 쓴 여성들이 많이 보입니다.

글자도 달라집니다. 태국어는 자체적인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말레이-인도네시아어는 라틴 문자로 표기합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영어를 제2언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곳곳에 영어 표기도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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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은 뒤 페낭까지 가는 열차. ⓒ Widerstand


시간대도 달라졌습니다. 태국과 말레이시아 사이에는 한 시간의 시차가 있죠. 사실 저는 너무도 당연히 시간이 한 시간 느려질 줄 알았습니다. 베트남에서부터 UTC+7 시간대를 사용했으니, 더 서쪽으로 달린 지금은 시간대가 느려져야 맞다고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막상 말레이시아에 도착하니 뭔가 이상했습니다. 시간을 다시 보니, 한 시간이 느려진 게 아니라 빨라졌더군요. 한국과 2시간의 시차가 나다가, 말레이시아에서는 오히려 시차가 1시간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시계를 보고 약간 혼란에 빠졌다가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동말레이시아의 존재를 잊고 있었구나.

동남아시아 유일의 연방제 국가, 말레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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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의 지도 ⓒ 외교부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 유일의 연방제 국가입니다. 이 말레이시아 연방은 3개 직할시와 13개 주로 구성되어 있지요. 13개 주 가운데 11개 주는 말레이 반도에 위치해 있습니다. 나머지 2개 주는 동쪽 보르네오섬에 위치해 있고, 이 두 주를 동말레이시아라고 부릅니다.

사실 동말레이시아의 영토는 서말레시아보다 한참 크죠. 우리가 흔히 휴양지로 알고 있는 코타키나발루가 바로 이 동말레이시아에 있는 도시입니다. 둘 사이를 오가는 데는 말레이시아인이라도 많은 제약이 따르지만, 어쨌든 동말레이시아 역시 말레이시아입니다. 덕분에 말레이시아는 UTC+8 시간대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연방제 국가라는 점에서부터 눈치채실 수 있겠지만, 말레이시아는 아주 독특한 체제를 가진 국가입니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았지만, 화교의 영향력이 강하고, 인도계 이민자도 많지요. 그러면서도 말레이 인의 정체성이 살아있고,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국가입니다. 아주 많은 문화권이 융합된 현장이지요.

저는 말레이시아에 입국한 뒤 기차와 페리를 타고 페낭으로 들어왔습니다. 특히 페낭은 말레이시아의 13개 주 가운데 중국계 인구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유일한 주죠. 물론 인도계와 말레이계 인구도 많습니다. 한때 영국이 건설한 말레이 '해협 식민지(Straits Settlements)'의 수도였던 탓에, 여전히 서양식 건축물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페낭섬에 도착해 숙소로 걸어갈 때부터 이 도시는 제게 독특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숙소 앞에는 중국계 도교 사원이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인도계의 거주 지역인 '리틀 인디아'가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저 멀리 보이는 이슬람 모스크에서는 시간에 맞춰 아잔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가톨릭 성당도 쉽게 찾아볼 수 있죠. 아주 이질적인 여러 문화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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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 중국 총상회 건물. ⓒ Widerstand

 
여러 문화권이 공존하는 모습이 꼭 종교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말레이시아는 영연방 국가이고, 영연방 국가가 많이들 그렇듯 정치체제에서도 영국의 영향을 짙게 받았습니다. 말레이시아 의회는 양원제로 구성되어 있고, 하원을 중심으로 정치가 움직입니다. 하원 다수당의 총재가 총리가 되고 내각을 구성하는 의원내각제 국가죠.

말레이시아의 정계는 최근까지 꽤 오랜 기간 '국민전선(BN)'이라는 정당 연합에 의해 장악되어 왔습니다. 이 정당 연합에는 말레이계를 대표하는 통일 말레이 국민 조직(UMNO), 중국계를 대표하는 말레이시아 화교협회(MCA), 인도계를 대표하는 말레이시아 인도회의(MIC)가 참여하고 있었죠. 정치 역시 세 집단의 연합으로 꾸려진 셈입니다.

또 한편으로, 말레이시아를 구성하는 13개 주 가운데 9개 주에는 여전히 세습되는 술탄이 남아 있습니다. 이 9명의 술탄 가운데 한 명이 말레이시아의 국왕이 되죠. 물론 정치적인 권한이 없는 상징적일 자리지만요. 술탄이 없는 4개 주에도 총독(Governor)이라는 상징적인 직책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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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의 카피탄 켈링 모스크. ⓒ Widerstand


법률에서도 그렇습니다. 말레이시아의 법률은 기본적으로 영미법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왕실에 반하는 행위만을 다루는 특별법원(Special Court)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죠. 여기에 무슬림에 한해 가족과 종교에 관한 문제를 판결하는 이슬람법(샤리아) 법원이 따로 존재합니다. 동말레이시아에서는 원주민들이 자치적으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권한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는 금융업이 발달한 국가이기도 해서, 세계 최대의 이슬람 은행 시장을 가지고 있죠. 이슬람에서는 대출이나 예금에 붙는 이자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금융 문제에 있어 여러 종교적, 도덕적인 규제를 가하고 있죠.

따라서 이슬람권에서는 이런 규칙을 준수하면서도 금융업을 영위할 수 있는 여러 상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는 그 선봉에 서 있는 국가죠. 사실 말레이시아의 금융업은 대부분 화교 자본이 장악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러 은행이 '이슬람 창구'를 설치하고 이슬람 은행업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중국계 은행에 설치된 이슬람 창구 역시, 말레이시아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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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영은행인 아핀 뱅크에 쓰인 아랍 문자, 한자, 라틴 문자 간판. ⓒ Widerstand


'부미푸트라' 우대 정책에 의해 차별받는 국민들

물론 이 다양한 문화권이 평화롭게만 공존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레이시아는 오랜 기간 중국계나 인도계에 대한 차별을 이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슬람을 믿는 말레이계 인구를 '부미푸트라'라고 부르는데, 이 부미푸트라에 대한 우대 정책이 말레이시아 내부는 물론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기도 하죠. 사실 중국계 인구가 많은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사실상 축출당한 것도, 문화적 동질성이 없는 동말레이시아가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한 것도 이 '부미푸트라'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말레이시아는 종교를 선택할 자유를 헌법상 보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슬람을 공식적인 국교로 삼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의 포교 활동은 금지되어 있고, 이슬람교를 믿지 않으면 법적으로 부미푸트라의 지위도 상실됩니다. 공립학교의 교육기회는 부미푸트라에게 유리하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정치권도 세 민족의 연합으로 구성된다고 했지만, 정작 지금까지 부미푸트라가 아닌 사람은 총리에도 부총리에도 오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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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자비에르 교회. ⓒ Widerstand


누군가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계의 국가인데, 다른 민족을 차별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요. 오히려 부미푸트라에 대한 우대 정책은 말레이계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실제로 부미푸트라 우대 정책이 시작된 것은, 화교 집단에 비해 경제력이 부족한 말레이계에 대한 빈민 구제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도, 인도계 말레이시아인도 말레이시아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말레이시아의 합법적인 국민입니다. 말레이시아의 근대사를 함께해 온 역사적 주체이기도 합니다. 말레이시아 연방이라는 근대국가는 그 다원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국가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민족을 차별하고 격리해야만 얻을 수 있는 민족의 정체성이라면, 그것은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사실 말레이시아에 정착한 중국계와 인도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인이나 인도인과는 꽤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계 인구는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화교가 그렇듯 남중국 출신입니다. 당연히 표준중국어가 아닌 차오저우어나 민남어, 하카어 등을 사용하는 집단입니다. 인도계 역시 힌디를 사용하는 북인도 계통이 아니라, 타밀어를 사용하는 남인도 계통의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오늘도 저는 페낭의 리틀 인디아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페낭뿐 아니라 말레이시아의 많은 도시에 '리틀 인디아'와 차이나타운이 자리잡고 있죠. 오늘도 어디선가 아잔 소리는 들려오고, 누군가는 사원 앞에서 향을 피우고 있습니다.

이 평화로운 풍경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잠깐 도시를 스치는 여행자뿐 아니라, 이 도시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것이 평화로운 풍경이기를 바랍니다. 차별과 배제가 아니라, 이 공존 자체가 말레이시아라는 국가의 새로운 정체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세계일주 #말레이시아 #페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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