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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식민 지배가 남긴 흔적

[인도네시아]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 자카르타

등록 2023.03.10 09:15수정 2023.03.1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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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싱가포르 일정을 마치고 저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습니다. 싱가포르 창이공항에서는 체크인부터 출국심사까지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있어 사람을 만날 일도 얼마 없더군요. 반면 도착한 자카르타의 수카르노-하타 국제공항에서는 백신 접종 확인부터 도착비자 구매, 입국심사까지 많은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도 정비된 대도시에만 있었고 또 싱가포르를 거쳤습니다. 그 뒤에 도착한 자카르타의 거리는 적응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더군요. 작동하지 않는 신호등과 끊임없이 밀려드는 오토바이, 그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며 길을 건너는 사람들. 완전히 달라진 풍경에 왠지 웃음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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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협업의 도시” ⓒ Widerstand


사실 싱가포르가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 왔더라도 비슷한 느낌이었을 겁니다. 자카르타는 제가 이제까지 경험한 도시와는 규모부터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일단 인도네시아부터가 인구 2억 7천을 넘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인구 대국이죠. 총 GDP도 동남아시아 부동의 1위입니다. 인구 1천만을 넘는 자카르타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입니다.


자카르타는 역사상 오래 전부터 항구 도시로 유명했던 도시입니다. 덕분에 서구의 진출을 가장 먼저 맞닥뜨려야 하는 도시이기도 했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자카르타 지역을 점령하고 '바타비아'라 이름 붙인 것이 벌써 1621년의 일입니다. 아직 네덜란드가 독립국가로 완전히 인정받기도 전의 일입니다.

네덜란드가 처음 진출했던 당시, 자바 섬과 수마트라 섬은 여러 술탄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 진출한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은 여러 술탄국과 때로 협력하고 때로 전쟁을 벌였죠. 자카르타를 장악한 네덜란드는 항구가 위치한 자카르타 북부 지역을 계획도시로 발전시킵니다.

처음에는 항구 도시만을 장악했던 네덜란드는 점차 내륙으로까지 그 영향력을 넓혀나갔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아시아 본부가 위치한 자카르타는 그 지배의 핵심이었죠. 179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해체되면서 설치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수도 역시 자카르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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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의 저택이었던 토코 메라 ⓒ Widerstand

 
나폴레옹 전쟁 시기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지배권은 잠시 영국에게 위탁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몰락했고, 네덜란드는 다시 돌아왔죠. 영국과 조약을 맺고 지배권을 확립한 네덜란드는 식민지를 더 확장했습니다. 수마트라나 자바 뿐 아니라 주변의 여러 섬으로 향했죠.

네덜란드는 때로는 무력을 앞세워서, 때로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이용해 여러 섬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발리, 칼리만탄, 술라웨시, 뉴기니까지 서로 독립적이었던 여러 섬이 네덜란드의 지배에 놓입니다. 각자의 역사를 이어나갔던 섬들은 이제 네덜란드의 지배라는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현대 인도네시아의 한 기틀이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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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옛 중앙은행 건물에 걸린 인도네시아 국기 ⓒ Widerstand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는, 식민 지배가 본질적으로 그렇듯 현지인에 대한 차별과 착취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발리 섬에서는 네덜란드의 점령에 저항하며 왕족과 귀족들이 일시에 자결하는 '푸푸탄' 의식이 곳곳에서 이어졌습니다.

벨기에 혁명으로 네덜란드 본국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자, 네덜란드는 더욱 착취적인 식민지 경영을 시도합니다. 식민 당국은 현지인을 혹독한 플랜테이션 농업에 강제로 동원했습니다. 전쟁의 참상과 현지인에 대한 착취는 네덜란드 국내 여론까지 뒤흔들었습니다.


여론에 떠밀린 네덜란드 정부는 1901년부터 소위 '윤리 정책(Ethical Policy)'을 식민지에 도입합니다. 특히 자바 섬은 이 정책의 주된 무대가 됐습니다. 병원과 복지시설, 학교가 갖춰지기 시작했죠. 철도와 도로 인프라도 만들어졌습니다. 발리 섬의 문화를 보존하며 관광 명소로 선전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하지만 현지인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이어졌죠.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1942년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미 1940년 네덜란드 본국이 나치 독일에 점령당해 주인 없는 식민지가 된 상황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지배는 그렇게 사실상 종결을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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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틸라 광장의 자전거 ⓒ Widerstand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가 끝나고 벌써 80년이 흘렀습니다. 현대사의 격변을 겪은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것도 70년이 넘게 지났죠. 자카르타는 '바타비아'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식민 시절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윤리 정책' 시절 만들어진 자바 섬의 도로와 철도는 지금까지도 주요 도로망과 철도망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자카르타 북부에는 유럽식 건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오래된 역에는 여전히 승객들이 오갑니다. 어떤 건물은 박물관이 되었지만, 어떤 건물은 여전히 그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는 의외의 흔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네덜란드는 본국처럼 자카르타 북부에서도 간척 사업을 벌였습니다. 덕분에 자카르타 북부는 낮고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죠. 이로 인해 자카르타는 기후위기와 해수면 상승의 피해를 심각하게 입고 있습니다.

우기마다 홍수 피해는 심각하고, 2050년까지 도심지 일부의 완전 침수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이미 4단계에 걸친 수도 이전 프로젝트를 가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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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바타비아 ⓒ Widerstand


네덜란드 지배 시절의 시청과 총독 관저가 있던 광장의 한 켠에는 19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오래된 건물이 아직 문을 열고 있습니다. 한때 총독의 사무실로도 쓰였던 이 건물은 이제 '카페 바타비아'라는 레스토랑이 되었습니다.

레스토랑의 바에서 맥주 한 잔을 하고는 광장을 둘러 보았습니다. 유럽식 건물이 들어찬 광장에서 히잡을 쓴 여성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인만을 위해 만들었을 광장이, 이제는 현지인의 주말 유람 장소가 되었습니다.

시간은 흘렀고, 시대는 흔적이 되어 남았습니다. 역사는 이미 지나가고, 흔적만이 우리 곁에 남았습니다. 이제 남은 사람들은 그 흔적 속에서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그 흔적은 때로는 유람의 장소가 되고, 때로는 수습해야 할 현실이 되기도 합니다.

독립 당시 50만에 불과했던 자카르타의 인구는 이제 1천만이 되었습니다. 도시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분명 어디엔가 흔적을 남깁니다. 형태가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말이죠. 이 거대해진 도시의 한 켠에도 과거의 흔적은 쌓여 있습니다.

우리 도시의 지층에 쌓인 흔적을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위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우리를 생각합니다. 건널 틈 없이 흘러가는 퇴근길 차량의 행렬을 지켜보며, 이 남국의 도시에서 우리의 오늘은 어떤 흔적으로 남을지를 문득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세계일주 #세계여행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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