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판소리 대가들이 득음한 곳, 물소리가 씩씩하구나

[지리산 고갯길 기행] 남원시 구룡계곡과 권삼득 명창의 덜렁제

등록 2023.03.05 16:17수정 2023.03.06 11:19
0
원고료로 응원
판소리 춘향가와 흥부가는 지리산 줄기의 고을인 남원에서 발생하였다. 판소리의 성행은 조선 시대 후기 평민들의 의식 성장과 활력을 반영한다. 춘향가는 남원 광한루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흥부가는 백두대간 운봉고원의 경제적인 역동성을 바탕으로 한다.
 
a

구룡계곡 챙이소. 계곡을 따라 흐르는 서늘한 솔바람에 마음은 삽상하다. ⓒ 이완우

 
지리산 만복대의 북서쪽 골짜기에서 흘러온 구룡계곡(九龍溪谷)은 원천천의 상류로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와 덕치리의 경계에 있다. 구룡계곡은 계곡 입구(150m)보다 350m가 높은 운봉고원(500m)의 끝단에서 낙하하는 물줄기가 3.4km 거리의 협곡에 수많은 폭포와 급한 여울의 수려한 풍광을 형성했다.

예로부터 이 계곡에서 판소리 소리꾼들은 마음껏 득음 수련에 정진하여 춘향가와 흥부가를 익혔다. 구룡폭포는 이 계곡을 대표하는 폭포이고, 육모정(六茅亭)은 이 계곡에 있는 정자이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구룡폭포, 육모정과 구룡계곡은 거의 동의어처럼 쓰인다.
 
a

비탈면 여울. 구룡계곡은 하나로 뭉쳐진 거대한 폭포와 여울 물소리의 세상이다. ⓒ 이완우

 
판소리 소리꾼들이 득음 수련 장소로 찾는 이 계곡의 육모정 가까이에 춘향가의 주인공인 춘향의 무덤이 전해오는 것도 지역 문화의 전통으로 이해할 수 있다. 3월 초순에 구룡계곡을 2시간 30분 걸으며 봄을 맞이하는 생명력을 공감해 보았다.


구룡계곡에 가득한 3.4km 길이의 폭포 소리

지리산국립공원 구룡계곡 주차장에서부터 계곡의 물소리는 들린다. 이 계곡은 9곳의 절경을 순서대로 9곡까지로 이정표처럼 이름 지었다. 제1곡은 송력동(松瀝洞)이다. 계곡 옆으로 송림이 울창하고 예스러운 돌 축대가 있다. 도로 옆의 탐방로를 따라가면서 바라보고 지나간다.
 
a

권삼득 유적비. 육모정 옆에 명창 권삼득의 유적비가 있다. ⓒ 이완우

 
곧 지리산국립공원 전북사무소와 춘향 묘가 보이고 육모정이 계곡을 향하여 서 있다. 제2곡 옥룡추(玉龍湫)이다. 보통 용소(龍沼)라고 부르며 소리꾼들이 득음 수련을 많이 한 장소로서 명창 권삼득(權三得, 1771-1841)의 유적비가 있다.

도로를 따라가다 계곡으로 들어서면 제3곡 학서암(鶴棲岩)이다. 계곡물이 호수처럼 잔잔하여 물고기가 많아서 학들이 즐겨 놀았다고 한다.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제4곡 서암(瑞岩)이다. 맑은 연못을 이룬 계곡 옆에 층층이 드러나 있는 기암이 병풍으로 둘렀다.

계곡물에 발을 담근 바위에 이끼가 무리 지어 자라는데 이끼 사이에 애기괭이눈이 꽃을 피워서 한참 들여다보았다. 직경이 5mm로 작은 꽃송이에 꽃잎도 없이 암술 수술을 노랗게 받쳐 든 모습이 진심인 듯 앙증맞다. 계곡의 바위 표면에서 추운 겨울을 이겨낸 생명력이 반갑다.
 
a

애기괭이눈. 바위 표면의 이끼 사이에 애기괭이눈이 꽃을 피웠다. ⓒ 이완우

 
계곡을 따라 흐르는 서늘한 솔바람에 마음은 삽상하다. 지금은 탐방로가 잘 조성되었지만, 이삼 백 년 전의 판소리 소리꾼들이 심기일전하여 수련하려고 협곡을 건너고 산비탈에 미끄러지며 새롭게 폭포를 찾아갔을 고행을 떠올려 본다.

신선이 머물 만한 선경이라는 제5곡 유선대(遊仙臺)를 지난다. 절벽이 치솟은 제6곡 지주대(砥柱臺) 암각서가 계곡 건너편 수직 절리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제7곡은 비폭동(飛瀑洞)으로 수십 길 단애에서 폭포가 쏟아진다. 제8곡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는 석벽인 경천벽(擎天壁)인데 석문추(石門湫)라고도 한다. 계곡의 폭이 새 한 마리 지나갈 정도로 넓지 않다는 의미란다.
 
a

깊은 계곡. 구룡계곡 낭떠러지 아래의 계곡이 아스라이 보이는데 폭포 소리는 여전히 힘차다. ⓒ 이완우

 
비폭동과 경천벽 사이의 탐방로는 수십 미터 높이의 단애 능선 마루를 탐방로 계단에 의지하여 힘들게 올라간다. 낭떠러지 아래의 계곡이 아스라이 보이는데 폭포 소리는 여전히 힘차게 울린다. 3.4km 길이의 구룡계곡은 하나로 뭉쳐진 거대한 폭포와 여울 물소리의 세상이다.


제9곡은 교룡담(蛟龍潭)이며 구룡폭포(九龍瀑布)이다. 높이 10m의 구룡폭포와 30m의 경사로 바위를 깎아내는 힘찬 여울은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의 절경이다. 용소에서 소용돌이친 힘찬 물결이 우렁차게 미끄러져 내린다. 물보라 날리는 폭포 주위에 햇빛이 비쳐 무지개가 펼쳐지면 장관이란다.

험한 지형의 협곡을 가로질러 설치한 구름다리에 서서 구룡폭포를 숙연하게 바라본다. 폭포의 물결도 무한하고 소리도 무한하다. 원시적인 물소리는 세속과 번뇌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일깨워주는 듯하다.

권삼득 명창의 콩 세 말 수련

명창 권삼득의 콩 세 말 일화가 있다. 보통 콩이 한 알에 0.25g이라면 콩 세 말이면 수만 개가 될 터이다. 그는 이 구룡계곡에서 한 바탕의 소리 공부를 마칠 때마다 콩 한 알을 용소에 던졌다. 콩 세 말이 든 자루가 텅 빌 때까지 정성으로 소리를 닦아 득음하였다고 한다. 그의 판소리 수련과 득음 과정에서 절차탁마한 세월과 노력을 비유한 일화이다.
 
a

용소. 구룡계곡은 폭포의 물결도 무한하고 소리도 무한하다. ⓒ 이완우

 
그는 신분 제약이 엄격했던 조선 시대에 양반으로는 최초로 판소리 소리꾼을 꿈꾸었다고 알려졌다. 천대받는 광대가 되기를 자원하여 그가 가문에서 멍석말이를 당한 사연부터 애틋하다.

권삼득은 전북 완주군 용진읍 구억리에서 태어나, 이곳 구룡계곡 아래 주천면 무수동의 외가에 살면서 판소리를 수련하였다. 그의 묘는 구억리 작약골에 있다.

그의 본이름은 권정이고 자는 사인(士仁)이다. 호가 삼득(三得)인데 새, 짐승과 사람 곧 하늘, 땅과 사람의 천지인(天地人) 세 가지 소리를 터득했다며 붙여진 호칭이다.

권삼득을 비롯하여 비가비 또는 양반광대로 진사 출신인 정춘풍, 판소리를 정리한 신재효, 서성관, 김도선과 안익화 등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이들은 판소리의 한글 사설에 한문 구절을 넣어서 의미와 표현을 풍부하게 하여 판소리의 발전과 대중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구룡계곡 폭포 소리를 닮은 덜렁제 가락

권삼득은 판소리에서 덜렁제를 창안했다. 신재효(申在孝)는 광대가(廣大歌)에서 권삼득을 가중호걸(歌中豪傑)이라며 그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 소리처럼 호탕하고 씩씩한 창법을 구사한다고 하였다. 덜렁제의 힘찬 역동성은 이곳 구룡계곡의 자연과 폭포 소리에서 영감과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a

폭포와 포트홀. 구룡계곡 용소에서 소용돌이친 힘찬 물결이 우렁차게 미끄러져 내린다. ⓒ 이완우

 
흥부가에서 놀부가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은 그가 개발한 선율인 덜렁제의 더늠을 대표한다. 덜렁제는 설렁제, 드렁조, 권마성조라고 한다. 도약 선법을 사용하는 덜렁제는 천 길을 솟아서 만 길을 내리치듯 중중모리로 흥겹게 출렁이다 사뿐히 가라앉으며 백성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전의 판소리는 애조의 계면조가 많았는데 활달한 감정과 힘찬 소리가 표출된 권삼득의 더늠 덜렁제는 판소리의 혁신이었다. 호기를 부리며 자신감 있게 덜렁대는 곡조는 흥겹고 힘찬 표현 영역을 확보하여 판소리가 양반과 평민 계급을 아우르는 대중성을 한층 높일 수 있었다.

권삼득의 판소리 덜렁제처럼 힘찬 구룡폭포는 백두대간 경계의 하천쟁탈 현상으로 형성되었다. 하천의 침식 능력이 큰 구룡계곡의 원천천이 두부 침식과 하방 침식을 진행하면서 운봉고원의 주촌천을 쟁탈하였다.

그 결과로 분수계인 백두대간 산맥이 동쪽으로 3km 이동하고, 하천 쟁탈 과정에서 급경사의 협곡에 구룡폭포 천이점이 발생하였다. 3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백두대간의 생동감 있는 지형 변화인 이 하천 쟁탈로 구룡계곡이 형성되고 수많은 폭포에서 힘차게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다.
 
a

고란초. 구룡계곡 암석의 절리 사이로 고란초가 겨울을 이긴 생명력으로 푸르다. ⓒ 이완우

 
구룡계곡은 세차게 쏟아지다가 여울져 흐르는 물소리로 가득한 세상이다. 폭포 물결과 소리의 힘찬 생명력이 권삼득의 판소리 더늠 덜렁제를 통하여 세상으로 나왔다. 습기를 머금으며 절벽을 이룬 암석의 절리 사이에서 생명력으로 겨울을 이긴 고란초가 판소리 가락처럼 푸르다.

3월 중순에 히어리가 군락으로 노랗게 피어나면 구룡계곡의 아홉 마리 용이 히어리꽃으로 변신하여 봄나들이 나온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지리산 국립공원의 깃대종 식물인 히어리가 개화하면 구룡계곡의 폭포 소리를 배경으로 권삼득의 덜렁제 가락을 들어보고 싶다.
#지리산 구룡폭포 #콩세말 명창 #비가비 권삼득 명창 #구룡폭포 하천쟁탈 #권삼득 덜렁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윤 대통령, 류희림 해촉하고 영수회담 때 언론탄압 사과해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