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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창간되자 가판1위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 36] 창간 때부터 진보적 논조때문에 시련이 따랐다

등록 2023.03.26 16:23수정 2023.03.26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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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 창간호 ⓒ 오마이뉴스

 
<민족일보>는 창간 때부터 시련이 따랐다. 진보적 논조 때문이었다. 장면 민주당 정부가 인쇄소 계약을 해지시켜 3일간 휴간한 뒤 3월 6일자로 속간할 수 있었다. <서울신문>에 압력하여 인쇄를 못해주도록 방해한 것이다. <민족일보>가 평화통일론을 주장하고, 민주당 정부의 2대 악법제정과 부정선거 원흉 등의 재판 지연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신문은 61년 2월 8일 체결된 한미경제협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혁신계의 주장과 논리를 대변했으나 논조는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민족일보>의 독특한 편집과 진보적인 주장으로 창간 초기부터 국민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갓 창간한 신문이 동아·조선과 비슷한 수준의 5만부를 발행하고, 가판에서는 단연 1위를 달렸다.

<민족일보>는 창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내 신문업계 판도를 흔들어 놓았다. 기성신문들의 절반 수준인 불과 3,40명의 기자들로 제대로 된 판매망도 구축하기 전에 가판 판매율 1위(4만 부)를 기록하였다. 발행부수도 5만 부를 넘어섰다. 당시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동아일보>가 2,3만 부 정도(1961년 9월 공보부 자료 기준)였으니 그 기세를 짐작할 만하다. 이 정도면 <서울신문> 등 정부 기관지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연일 비판의 대상이 돼온 장면 정부는 긴장하기 시작하였고 이내 정부 차원의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주석 8)

국민들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진보성향의 신문·잡지를 폐간시키고, 국내에는 보수우익을 대변하는 어용지들이 판치다가 모처럼 진보·정론지를 표방하는 <민족일보>에 성원을 보내었다. 기획이나 편집이 기성신문과 차별성이 짙은 것이 독자들의 시선을 끌었던 것도 사실이다. 

김자동은 편집국이나 취재팀은 대부분 지면이 있거나 의식이 유사하여 갈등같은 일이 없었다. 그는 정치부 소속이지만 관심 범위가 다양하고, 주필이나 편집국장이 그의 능력을 익히 아는 바로 신생 언론의 기획이나 주요 이유는 그가 집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창간 당시 4개 면 중에 외신면이 한 면이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국제뉴스 비중은 높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민족일보>에는 외신부가 없었다. 나는 정치부에 소속돼 있으면서도 외신부 일을 겸하였다. <조선일보>시절 외무부도 출입하고 했으니까 자연스럽게 내게 일이 주어졌다. 나는 외신기사 번역보다는 국제 문제에 대해 논평이나 해설성 기사를 주로 썼다.

논설위원 중에 영어를 잘했던 고정훈도 더러 해설기사를 쓰곤 했는데 내 마음에는 별로 들지 않았다. 차라리 이건호 논설위원의 글이 훨씬 더 좋았다. 고려대 법대 교수로 있던 그는 <민족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나중에 <민족일보> 사건 때 그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주석 9)


<민족일보>가 창간되어 '장안의 지가'를 올리고 있을 즈음 마산 3.15의거 일주년이 임박했다. 4.19 민주혁명을 촉발한 거사였다. 김자동은 정치부 소속인데도 마산시의 3.15의거 1주년 행사 취재를 위해 현장으로 내려갔다. 편집국장과 주필이 마산의거 1주년의 의회를 높이 사고 그를 파견한 것이다. 장면 총리를 비롯 국회의장 등 정부요인 다수가 참석예정이었다.

기념식 하루 전날인 14일 나는 마산에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시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민주의 성지' 마산시내는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집권한 지 채 반년도 안 돼 장면 정부가 데모규제법, 반공특별법 등 소위 '2대 악법' 제정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행사 당일 반정부 시위에 대비해 치안국장이 현장에서 진두지휘를 하였으며, 경남도경 소속 기동경찰 8백여 명이 시내 곳곳에서 삼엄한 경계를 폈다.

마침내 3월 15일이 밝았다. 오전 10시 마산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마산 3.15의거' 1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기념식에는 장면 총리를 비롯해 정부 요인과 의거단체 관계자, 부상자, 그리고 소복차림의 유가족 등 3만 5천여 명이 참석해 고 김주열 열사 등 12영령의 명복을 빌었다. 장 총리는 추도사를 통해 "대한민국의 부흥과 통일을 기어이 이루어 놓는 것이 영령에 대한 나의 충정이며 일념"이라고 말했다. (주석 10)


주석
8> <회고록>, 352쪽.
9> 앞의 책, 356쪽.
10> 앞의 책, 357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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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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