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뿐만 아니라, 대보름 등 무슨 날 후면 도착하는 반찬들. 저 정도면 정말 잔치해도 되겠다. 사진은 지인 찬스.
최은경
20대에 독립을 시작할 때는 마냥 좋았다. '부모님 품 속' 굴레를 벗어던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먹고 자고 놀 수 있는 독립생활은 비록 조촐했지만, 자유롭고 즐거웠다. 부모님의 안부 전화는 잠깐의 생사 확인 후 후다닥 끊기 일쑤였고, 본가에 가는 일은 연례행사였다.
어김없이 거하게 보내준 반찬을 더 이상 들어갈 곳 없는 냉장고에 테트리스 조각 끼워 맞추듯 쑤셔 넣으며 '뭘 이리 많이 보냈냐'며 짜증을 내는 일은 다반사였다. 독립은 했어도 언제나 마음 한켠은 부모님께 걸쳐 있었지만, 공사가 다망했던 청춘의 삶은 부모님의 관심과 보살핌을 온전히 소화하기엔 너무나도 바빴다.
부모님에 대한 극적인 심경의 변화는 아마도 불혹을 넘기며 시작된 것 같다. 두 손을 잡고 병원을 모셔가던 날, 이제는 내가 부모님의 보호자임을 실감하던 날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대고 있던 부모님을 이제는 내가 받쳐 줘야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였을까? 비상시에만 가동하던 나의 걱정 레이더가 연중무휴 가동을 시작했다. 짐을 손에 들고 다니는 것보다 수레에 넣어 끌고 다니는 게 수월한 부모님은 바퀴가 달린 장바구니 카트를 자주 이용하시는데, 언제부터인가 카트를 끌고 다니는 보도블록이 내 눈엔 자갈밭처럼 보인다.
재활용품 수거장은 왜 하필 지하에 있는 건지, 빙 둘러 걸어 내려가야 하는 비탈길이 낭떠러지처럼 느껴지고, 이미 욕실화는 미끄럼방지용으로 교체했건만 욕실 바닥이 마치 빙판길처럼 보인다. 걱정에 걱정이 꼬리를 물다 문득 떠오르는 의문 하나. '내가 걱정을 사서 하는 타입이었나? 웬 걱정이 이리 많아졌지?'
"장바구니 카트 밀 때 바닥 조심하고, 재활용품은 내가 가서 버릴 테니 모아두고, 욕실에서 조심해서 걸어 다니고... 어쩌고저쩌고... 알았지?"
조심해야 할 100여 가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늘어놓다 또 다시 의문에 빠진다. '내가 잔소리가 심한 타입이었나? 뭔 말이 이렇게 많아졌지?' 딸이 시어머니처럼 잔소리를 한다는 엄마의 말에 잔소리 폭격을 멈췄다.
고작 저녁 9시에 밤이 너무 늦었으니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남기던 아빠의 전화에 코웃음을 치던 내가 떠오른다. '아빠 나 마흔 넘었어, 걱정 마.' 아빠와 엄마도 지금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지는 않을까? '딸아 우리 아직 70대다, 그 정도는 안다.'
40대의 딸과 70대의 부모님이 서로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취급을 한다. 부모님은 '혼자' 사는 딸이 걱정이고, 나는 '늙은' 부모님이 걱정이다. 다른 점이라면 부모님의 걱정은 내가 혼자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시작된 반면, 나의 걱정은 부모님이 찐할아버지, 찐할머니 대열에 오르면서부터 모터를 달고 질주 중이라는 거다. 이미 충분히 조심하고,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걱정은 차고 넘쳤다.
서로에게 '더하기'가 되어주는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