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경 중부시장에서 시다로 일할 때의 전태일(가운데). 20살이 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해설책을 찾아 읽기 시작한다.
전태일의 집
전태일은 막내 여동생 순덕이를 업고 서울에 왔으나 동생과 함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어 보육원에 맡겼다. 혼자 떠돌며 밑바닥 비렁뱅이 생활을 했다. 1965년 8월에 전태일은 운명의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봉제사업장의 시다로 취직했다. 우여곡절 속에 어머니와 만나 어머니가 그간 벌어 모은 돈과 쥐꼬리만한 자신의 월급을 합쳐 천막을 구입했다. 남산 아래 천막촌으로 갔으나 일대에는 천막 칠 장소도 없었다. 악착같이 돈을 더 모아 10월에 남산 판자촌에 방 한 칸 세를 얻었다. 보육원에 맡긴 순옥이도 데려 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온가족이 모였다.
꼬투리만한 행복도 잠시, 남산동 일대 모인 판자촌을 홀랑 태운 큰 불이 났다. 전태일 가족은 다행히 인명 사고 없이 도봉동 화재민 수용소 대형 천막촌으로 갔다. 1966년 10월에 쌍문동 공동묘지 터에 세운 화재민 판자촌으로 다시 옮겨 거기서 전태일은 삶을 마감할 때까지 약 4년 동안 정착했다. 마지막 거주지 쌍문동에 살 때 막내 여동생 순덕(현 이름 태리)의 오빠에 대한 기억이다.
"남산에 살 때 불이 나 쌍문동으로 이주를 온 거죠. 제 어릴 때 정서가 다 거기더라구요. 천막 교회가 생기고 모두 천막을 치고 살았어요. 천막 교회에서 전도사님들이 저희 어린아이를 모아 놓고 공부도 가르쳐주고 그랬어요. 그 추억이 저한테는 그래도 남아있어요.
그때 그 화재민촌에는 다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없는 동네는 싸움을 많이 하더라구요. 눈만 뜨면 동네 어디에선가 막 싸우는 거예요. 부부끼리도 싸우고, 부모 자식 간에도 싸우고, 이웃끼리도 싸우고, 싸움이 잦아들 날이 없더라구요. 왜들 이렇게 싸우나 그러는데, 그때 보면 청년들이 나름대로 삶이 고달프니까 부모들에게 저항도 하고 서로 갈등이 쌓여 있었겠지요.
분쟁이 가정에서부터 이웃으로까지 많이 일어나는데, 제가 볼 때 큰오빠는, 세상에 저런 오빠는 없어, 내가 느끼는 우리 오빠는 정말 좋은 오빠야, 우리 오빠는 효자야, 저는 어릴 때 느낌으로 그게 오는 거예요.
이웃집을 보면 못사는 동네니까 그게 공개가 되고, 밖에 나와서도 싸우고 막 싸우는 데 큰오빠 같은 경우에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이 보이는 모습을 안 보이더라구요. 아, 우리 오빠는 참 착한 오빠구나, 그러면서 항상 공손하게 아버지한테도, 엄마한테도 말대꾸 한번 안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1969년) 이제 오빠가 저의 보호자가 된 거예요. 엄마는 아침에 일어나면 곧바로 일터로 가시고 나서 오빠가 출근을 해요.
저한테 오빠는 너무 큰 존재였어요. 모든 걸 전부 오빠한테 얘기 하면 오빠가 저의 요구를 다 들어줬어요. 대단한 건 아니지만 내가 조그마한 거 하나라도 얘기하면은, 예를 들면 오빠가 아침에 출근을 해요. 저는 그때 오빠가 평화시장 일을 하러 가는 건지 뭔지 모르는데 나가며는 제가 막 쫓아나가요. 나가서 '오빠 돈 1원'만 그래요. 그럼 오빠가 1원을 꼭 줬어요, 저한테는 그게 그 하루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저는 오빠가 출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저는 우리 오빠가 세상에서 최고로 좋았어요."
연은 진흙에나 시궁창에서도 꽃을 기품 있게 피기에 예로부터 글 쓰는 이들에게 찬탄을 받았다. 고금의 문인들이 찬양한 연꽃의 미덕이 전태일의 미덕과 다를 바 없다면 지나친 말일까?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전태일의 삶은 주변의 부조리와 환경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연꽃처럼 고결했다. 연꽃잎 위에는 한 방울의 오염도 머물지 않는다. 전태일은 악이 있는 환경에서도 결코 악에 물들지 않았다. 연꽃이 피면 물 속의 시궁창 냄새는 사라지고 연못엔 향기가 가득하다. 전태일의 고결한 인품은 주위를 훈훈하게 하고 사회를 정화했다.
연꽃은 어떤 곳에 있어도 푸르고 맑은 줄기와 잎의 지닌다. 전태일은 오염한 주위 환경에서도 청정한 몸과 마음을 간직했다. 연꽃은 싹부터 다른 꽃과 구별된다. 넓은 잎에 긴 줄기, 굳이 꽃 피워봐야 연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태일은 남루한 환경에서 살았더라도 누가 보더라도 존경스럽고 기품이 있는 청년이었다.
맹자는 어머니의 깊은 교육환경 배려로 동양에서 '공자 다음으로 우르르 보는 성인'(亞聖)으로 높이 받드는 대사상가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다. 사람은 원래 착하다는 뜻이다. 그 근거로 사람은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인 사단(四端)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했다. 맹자는 어질다는 인(仁)에서 나오는 마음을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했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가엾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유교 최고의 윤리 덕목으로 꼽았다.
전태일은 부모의 교육 배려를 거의 받지 않고 무지렁이 환경에서 홀로 꽃을 피웠다.
자신에게 안긴 비참하고 괴롭고 힘든 폐허에서 고개를 돌리거나 발버둥치지 않고 정면을 바라봤다. 삶의 고통에 온 몸이 쑤셔도 저속하고 상스럽게 떠들거나 사소한 울분을 내뱉지 않았다.
만 17세에 처음 얻은 일자리는 청계천 평화시장의 밑바닥 노동자, 그 밑바닥에서 '어린' '여성' '노동자'의 기막히게 가엾고 불쌍한 노동 현실을 봤다. '어린' '여성' '노동자'에게 보낸 전태일의 연민은 맹자의 측은지심과 한치도 다를 바가 없었다. 무지렁이 전태일이 대사상가 맹자의 통찰력과 견줄 수 있는 수준의 '인간애'를 지녔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전태일은 짙은 탁류가 자신의 온 몸을 감싸고 느릿느릿 흘러도 고결한 인간이 지닌 품성에는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다. 비렁뱅이였고 무지렁이였던 전태일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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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태일의 친구들은 전태일 50주년인 2020년에 전태일이 살았던 곳 가운데 유일하게 흔적이 남은 대구 남산동 집을 시민모금으로 매입했습니다.
현재 열 평이 채 안 되는 주인집은 허물어지기 직전인 상태입니다. 그 마당에 4평 정도의 시멘트 벽돌과 판자로 만들었던 전태일 가족이 살았던 셋방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 4평도 반으로 나누어 2평은 근처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매가 살았고, 나머지 2평은 전태일 가족 여섯 명이 아버지가 만지는 재봉틀 2대를 놓고 살았습니다. 상상하기조차 좁은 주거 환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태일은 그곳에서 잠시나마 공부할 수 있었던 대구 남산동에 살았을 때를 자신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전태일의 친구들은 방치된 본채를 더 이상 허물어지지 않게 하고, 흔적이 남은 전태일의 셋방 터를 보전하려고 합니다. 전태일의 삶을 기억할 수 있는 이 유일한 흔적을 보전한다면 우리 사회의 크나큰 정신 교육장이 되리라고 (사)전태일의 친구들은 굳게 믿습니다. 또다시 시민 모금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어, 시민들의 힘찬 성원을 염치없이 기대합니다.
(사)전태일의 친구들 이사장 송필경 드림
문의: 010-5544-4288 (전태일의 친구들)
홈페이지:
http://dgchuntaeil.org/gnuboard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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