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모르지만 좋아해서 벌인 일

[퇴근 후 시 모임] 다 이해하지 못해도 좋아할 수는 있으니까

등록 2023.03.22 09:47수정 2023.03.2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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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잠깐이었지만 어렸을 땐 시인이 되고 싶었다. 시를 나름 좋아했던 것 같다. 백일장에 나갈 때면 꼭 시로 참가했고, 일기장을 채우기 막막한 날이면 시를 썼다. 내게 시는 '빨리 쓰고 놀 수 있는 것'이었다.


커가면서 시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란 사실을 금방 눈치챘다. 문학적 글쓰기는 재능이 필요해 보였고, 나는 그게 없어 보였다. 기자로 꿈을 바꾼 나는, 그래도 언젠가 시를 써보고 싶다는 소망만 남겨뒀다.

오래된 소망을 다시 꺼내본 건 지난해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쉬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음이 곪아있던 시간이 길었던 터였다. 나를 돌보는 데 시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시가 말랑말랑하지만은 않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은 나였지만, 그래도 슬픈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계가 그 세계라는 걸 알았다.

나는 어느 젊은 시인의 수업을 신청했다. 그 수업에서 나는 '합평'이란 것도 처음 해보고 시도 직접 써봤다. 그럴 때마다 시에 조예가 깊어 보이는 '문우들'을 의식했다. 그럴싸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못 알아듣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신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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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진’ 시들은 수첩에 또박또박 옮겨적었다. ⓒ elements.envato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나는 내내 투덜댔다. 시라는 게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정확히는 시 쓰는 사람들이 너무 그들만의 세계에 빠진 것 같았다. 외계어를 늘어놓고 본인도 무슨 뜻인지 모를 때가 있다는 게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자고로 쉽게 읽히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나도 남의 글을 꼼꼼히 안 읽으면서 내 글은 남들이 행간의 의미까지 파악해주길 기대하면 안 된다고 믿는 나로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도 어쩐지 시가 좋아 시를 꾸준히 읽었다. 시는 원래 노래였다니 노래처럼 읽었다. 시집이란 앨범을 넘겨보다 꽂히는 트랙의 시를 애착했다. '건진' 시들은 수첩에 또박또박 옮겨적었다.


지난 월요일엔 퇴근하고 시 읽기 모임도 다녀왔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 이야기를 원 없이 나눴다.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도 계속되는 원풀이를 들으며, 시의 세계를 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좋아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시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법이니까.

"취미가 뭐예요?"라는 질문에 "시 읽기요"라고 자신 있게 말해볼 날을 꿈꿔왔다. 이제는 조금 용기를 내봐도 되겠다. 나는 시를 모르는 사람, 그리고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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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너마저의 오랜 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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