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마애삼존불 보호각(2005). 풍화방지로 1965년 설치되었다가 보호각 내부 암벽습기 등의 문제로 43년만에 완전히 철거되어 2007년부터 자연 햇빛을 통한 천년의 미소를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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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4호로 지정된 서산용현리마애삼존불이 대한민국에 대중화된 것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권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3년 '남도 답사 일번지'로 시작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가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1997년 3권을 출간하였다. 서산마애삼존불 사진이 표지 모델로 등장하고, 삼존불과 관련된 에피소드와 30여 년 간 서산마애불을 관리해온 성원 할아버지의 애절한 사연이 실려있다. 책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산마애삼존불이 역사학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59년이다. 숫자상으로는 64년 전이지만 실제로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과 같다. 6․25 전쟁이 끝난 지 불과 6년 밖에 안 되었고, 교통편이나 도로 사정이 아주 흉악하고 인적이 닿지 않는 심심산골이 많던 시절이다.
부여박물관장을 지낸 홍사준 선생이 보원사터를 올 때마다 동네 사람들에게 바위에 부처님 새긴 것이나, 석탑이 무너진 것 등을 묻곤 했는데 어느 날 나이 많은 나무꾼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산 중턱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바위에 새겨져 있유. 양 옆에 본 마누라와 작은 마누라도 있는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 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 마누라가 장돌을 쥐고 집어던질 려고 하는 게 있슈."
- *출처: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권(서울: 창비,1997), 38.
위대한 발견의 순간이었다. 나무꾼의 해석은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 남아있던 처첩제도의 사회상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어느 전문가의 해석보다도 현실적이고 그럴듯한 해석이었다. 그런데 오늘 또 다른 해석을 들었다.
"아빠, 저 불상이야. 5천 원 불상. 크크크, 3천 원 말고 5천 원."
가족이 함께 왔는데, 초등학교 1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본존불의 손가락 모양을 보고 경험적 해석을 한 것이었다. 60년 전 나무꾼 아저씨 못지 않은 멋진 품평이었다.

▲초등학생이 생각하는 서산마애삼존불과 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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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다. 천년의 미소, 백제의 미소와 인사를 하고 나오다 보면 관리사무소 못 미쳐 작은 석불이 하나 있었다. 우리 같은 소시민의 소원을 들어주는 불상 같아서 특히 좋아했었다. 보원사지에 있었던 석조비로자나불 좌상을 이곳에 옮겨다 놓았던 것인데, 2005년에 분실되어 지금은 받침대만 남아 있었다.

▲서산마애삼존불 입구에 있었던 보원사지 석조비로자나불(2005). 2005년 3월 분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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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보원사지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다시 서산마애삼존불을 찾았다. 늦은 오후 햇살에 비친 천년의 미소가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삼존불은 오늘 모든 것을 내어주지 않았다. 해는 이미 삼존불상 어깨를 넘어가 등 뒤를 비추고 있었다. 고향에 올 때 또 한번 오라는 삼존불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삼존불 본존불에서 보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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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삼존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돌아선다. 계단을 내려오며 어머니를 보듯이 다시 돌아 보았다.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근심하지 마. 오지 않은 미래 걱정하지 말구. 오늘 잘살아. 몸만 건강하면 돼. 오늘은 선물이여. 그래서 서양 놈들도 Present(오늘)라고 하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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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삶이 되고, 삶이 세월속에서 문신이 되고 꽃이 되어, 저만치에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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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도 울고 갈 천년의 미소", 서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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