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박도
그의 번역작업은 계속되었다.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것이 생계의 수단이 되었다. 한스 윈의 <모택동전기>(4권)은 국내에서 최초로 번역한 모택동의 전기여서 화제를 모았다. 러시아 10월혁명을 소재로 한 솔로모프의 장편소설 <고요한 돈강>(5권)은 예상보다 찾는 사람이 많았다.
이 시기 그가 중국과 러시아 혁명지도자들에 대한 전기를 번역한 것은 공산권의 도저한 변화를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1984년 12월 영국과 중국이 홍콩반환 협정을 조인하고 1985년 3월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개혁파인 고르바초프가 취임하였다. 1987년 초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 운동의 변화와 동맹국 불간섭을 천명하였다. 공산권이 거대한 변화의 용트림을 하고 있는데 한국사회는 여전히 죽의 장막이 걷히지 않은 채 그쪽 서적은 '불온'의 낙인을 찍었다.
그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에 관심이 많았다. 역사상 유례 드문 철권정치를 자랑하던 짜르체제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 세계에 포위된 상황에서 최초의 사회주의국가를 창립한 러시아혁명을 이룰 수 있었는가, 학구적 관심이 따랐다.
"20세기의 대사상가로서 동시에 대혁명가로는 세 사람을 그 대표로 들 수 있다. 중국의 손문 및 모택동과 소련의 레닌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아마도 20세기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상 이렇게 두 분야에서 함께 특출한 위치에 오른 인물은 별로 없을 것이다." - 김자동은 <레닌의 회상>을 번역하면서 <역자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모택동전기>를 번역한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사회과학도들은 물론 레닌의 사상에 대한 연구를 해야 마땅하겠지만, 그의 사상적 발전을 알기 위해서도 그의 전기를 꼭 읽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상식을 넓히는 의미에서도 레닌의 생애는 알아 두어야 할 부분이다.
1925년 트로츠키가 집필한 <레닌 전기>를 필두로 하여, 레닌 및 레닌주의에 관한 수많은 서적을 참고로 볼 수 있다. 그중에도 레닌의 평생 동지이며 반려자인 N.K.크루프스카야가 저술한 이 <레닌의 회상>은 가장 훌륭한 작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 내용이 풍부하여 마치 소련 공산당사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 작품을 통하여 사소한 개인적인 일들은 가볍게 넘겨 버린 듯 하다. 그러면서도 레닌의 인간적인 면이 곳곳에 엿보이며, 읽기에도 흥미롭다. (주석 8)
역자의 충실한 번역과 상세한 '서문'으로, 이 책의 내용을 대강 살피게 한다.
이 책은 전부 3부로 나누어져 있다. 제1부는 1893년 크루프스카야가 레닌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1907년 말 제2차 망명 때까지를 담고 있다. 그들은 5년간, 당시 페테르스부르크였던 레닌그라드에서 함께 동지로 활동하며 서로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연애에 관하여는 단 한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레닌이 1898년 시베리아로 유배되자, 그녀는 당국에 대하여 약혼자라고 주장하고 유배지로 가서 함께 귀양살이를 한다.
그리고 1901년에는 함께 해외망명을 한다. 1905년에 일시 탄압이 완화된 조국 러시아로 돌아가지만, 반동이 다시 격화된 1907년 다시 망명길에 오른다.
첫 번째 망명기간 중에 1903년 런던의 사회민주당대회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이 있은 후, 젊은 레닌은 볼셰비키의 영도적 지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크루프스카야는 계속 아내이며 동지로서 그의 뒤를 돌보게 되었다.
제2부는 1907년 제2차 망명에서 1917년의 2월혁명 후 귀국하여 10월(러시아 구력)의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하기 직전까지를 다루었다.
제1부와 제2부만으로 된 회상록이 1930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1893년부터 1917년의 기간 동안 두 사람은 공적 및 사적으로 거의 떨어진 일이 없이 생활하였으므로 크루프스카야는 레닌의 일거일동을 거의 빠뜨리지 않고 지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10월혁명 후 크루프스카야는 교육행정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교육이론과 교육사의 수립, 혁명 후의 문맹퇴치 및 성인교육, 실천적인 기술교육체제의 확립 등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레닌의 공적활동에 일일이 참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초판에서 크루프스카야가 그의 회상록을 1917년까지 끝맺은 것도 아마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3부는 1917년 11월 7일의 봉기에서 1919년 혁명 제2주년까지의 기간을 다루었다. 이 기간 중 소련은 브레스트-리토르스크의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어야 했으며, 도처에서 짜르의 잔당들과 싸워야 했다. 볼셰비즘의 전파를 두려워하는 제국주의 각국은 이들 백군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파병까지 하여 소련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고자 노력을 하였다. (주석 9)
주석
8> N. K. 크루프스카야, 김자동 역, <레닌의 회상>, <서문>, 일월서각, 1986.
9> 앞과 같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