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단 총재 김가진
석탑출판
사람은 대체로 나이가 많아지면 사회적 역할이 줄어드는데, 그는 반대였다. 스스로 택한 역할도 있으나, 국가나 사회에서 하지 않음으로써 떠맡은 경우도 없지 않았다. 조선민족대동단(대동단)에 대한 기념사업도 그중의 하나다.
대동단(大同団)은 3.1혁명 와중인 1919년 4월 국내에서 조직된 첫 항일 지하점조직이었다. 1차 '강령'에서 독립·평화·자유를 내걸고, 그해 9월에 독립·평화·사회주의로 바꾸었다. 자유 대신 사회주의를 택한 것은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으로 국제화의 물결에 따른 조처였다.
대동단은 여전히 남아 있는 신분제 사회 구조에서 양반·상놈을 가리지 않고, 실제로 단원 중에도 여성·백정·보부상·상인·학생·관리·종교인 등이 다수 참여했다. 명칭대로 대동단결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의지였다.
3.1혁명이 일제의 무력으로 짓밟히자 제2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한때 의친왕 이강을 해외로 이주시켜 망명정부를 시도하고, 그런 의미에서 보황주의 또는 복벽주의라는 프레임이 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동단 단원 80여 명이 국가의 서훈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이 단체의 활약상이 나타난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단체(조직)의 서훈자는 대동단이 가장 많았다.
2002년 경, 집안 가족모임에서 할아버지 동농 김가진기념사업회를 꾸리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현대자동차 납품사업이 궤도에 안착해 재정적으로 안정을 찾은 때였다. 자손들이 먹고살 만하면 선대 기념사업회를 꾸리는 일이 흔하다. 며칠 생각한 끝에 나는 조선민족대동단(대동단) 총재를 지낸 할아버지만 기념할 게 아니라 대동단 전체를 기념하는 기념사업회를 만드는 게 좋겠다고 했다. 2002년에 설립된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주석 1)
대동단기념사업회는 2002년 4월 23일 준비위원회(위원장 이만열)를 구성하고, 유가족의 모임에 이어 6월 9일 창립식 및 기념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목적 사업은 "단원이었던 선열의 항일독립 정신을 계승하여 역사적 의의를 기리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학술회의, 대동단 단원 관련 독립유공자의 각종 기념행사, 자료발굴, 영인본 제작 및 출판사업 등이 제시되었다. 임원은 이사장 조문기, 부이사장 김자동, 감사 조용환·박창기, 사무총장 차영조, 이사에는 조문기·김자동·민규식·차영조·최기창·황용만이 선임되었다. 김자동은 지위는 부이사장이지만 실질적으로 기념사업회를 이끌었다.
김자동은 대동단기념사업회에 많은 공역을 들였다. 할아버지가 대동단의 총재여서 가업이기도 하지만, 그 시기에 치열하게 활동했던 대동단의 조직과 활동상을 살피고 기념하기로 한 것이다. 우선 자료를 모았다. 학자는 아니지만 자료수집과 연구는 여느 학자의 열정에 못지 않았다.
대동단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만세시위가 본격적으로 전국으로 퍼져가던 시기인 4월 초에 결성됐으며, 결성된 지 약 반 년 후 본부 조직이 노출되어 지도급 인사 대부분이 투옥되는 불운을 겪었다. 대동단 단원이었던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대동단 결성에 최초로 관여한 사람은 단장을 맡게 된 '두암' 전협 외에 최익환, 권태석, 권헌복, 정남용 등이다.
이들은 모두 당시의 지식인들로서 출신 배경은 다르지만 나라를 되찾겠다는 열정은 같아 아주 짧은 시일 안에 항일 지하조직을 구축하자는 데 합의를 본 것이다.
일제경찰과 검찰 조사 기록을 보면, 대동단이란 조직의 명칭은 '역전' 최익환이 제안한 것이다. 그는 법정에서 "…정의·인도는 세계에 동일한 것이고 조선인도 이 크나큰 정의·인도 아래 단결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대동단이라는 명칭을 만들었다고 진술했다. (주석 2)
거족적인 3.1혁명의 와중에 왜경의 눈을 피하고자 대동단은 당시 한강에 배를 띄워 놓고 조직하였다.
지하조직 대동단을 결성하기로 뜻을 같이한 이들은 각기 포섭 대상을 찾아 조직을 해나갔으며, 단시일에 상당히 많은 동지가 규합됐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초 창립총회를 열게 됐다. 창립총회는 왜경의 눈을 피하고자 뱃놀이를 가장했다. 전국에서 모인 대표자 40여 명이 술판을 벌이는 것으로 보이게 기생 20여 명까지 배에 태우고 한강 가운데서 개최했다. 배 위에서는 선비들이 기생들과 술 마시고 춤을 추며 난장판을 꾸며 연출했고, 배 아래에서는 대동단 규약이나 조직, 투쟁 방안 등을 심각하게 논의하였던 것이다. (주석 3)
주석
1> <회고록>, 162쪽.
2> 김자동, <상하이 일기>, 20~21쪽, 도서출판 두꺼비, 2012.
3> 앞의 책,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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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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