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그거 걸었다고 인대에 염증이라니, 발목마저 사십이 넘었다고 유세를 떤다.
변은섭
그래도 절뚝거리지 않고 걸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통증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나의 소중한 발목을 달래고 얼래서 잘 보살펴야 한다. 1인 가구에게 병치레는 아파서 힘들고, 혼자여서 서러운 일이다.
혼자 살면서 가장 강렬했던 기억은 응급실에 실려 간 일이다. 1인 가구의 숙명처럼 혼자였고, 몸은 아팠다. 한번도 119를 불러본 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이정도 아픈 것에 119를 불러야 하는 건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괜찮아지겠지, 조금 참으면 나아지겠지 하면서 시간을 보낸 게 실수였던 건지, 극한의 고통이 한순간에 찾아왔다. 다른 가족들에게 연락할 새도 없이, 나는 핸드폰을 붙잡고 119에 전화를 걸어 SOS를 청했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아팠지만 정신줄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이 모든 과정을 처리할 사람은 1인 가구의 1인, 나뿐이었다.
구급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들숨과 날숨을 들이쉬며 응급실에 당도했지만 거기서도 아프기만 해서는 안 됐다. 응급실 접수를 하고,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한다는 서류에 사인도 해야 한단다. 앞이 노란 채로 뭐라고 쓰여 있는지도 모를 서류에 사인을 했다.
보호자가 동행했다면 보호자가 할 일이었지만, 혼자 덩그러니 놓여진 응급실에서는 내가 해야 했다. 다른 응급실의 환자들은 보호자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난 나의 한 손을 다른 손으로 꼬옥 잡아주었다. 출산의 고통과 맞먹는다는 요로결석을 진단받고 난 그렇게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다행이라면 용기가 충만했던 29살이었고, 세상에 별로 두려울 게 없던 청춘이어서인지 강렬했던 응급실의 기억은 치료가 되어가는 요로결석의 통증처럼 서서히 흐릿해져갔다. 무엇보다 응급실에서 병실로 옮긴 후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온 부모님의 지극한 간호 덕에 병도 잘 치료하고, 무사히 퇴원할 수 있었다.
용감무쌍하게 혼자 응급실의 경험을 겪어낸 것도, 부모님의 간병 덕에 별 어려움 없이 병원생활을 이어간 것도 20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40대 중반인 나는 더 이상 용기가 충만하지도 않고, 연로하신 부모님의 간병을 받을 수도 없다.
나이만큼 많아진 나에 대한 책임감
40세를 기점으로 몸이 전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몸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더욱이 20~30대 때는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하나 둘 탈이 나기 시작했다. 한 곳이 좋아지면 다른 곳이 아프고, 계주달리기에서 바통을 이어받듯 병치레의 향연이 펼쳐졌다. 한 번 아프면 빨리 낫지도 않는다. 완치까지 시간도 오래 걸려 생각지도 않게 인내심마저 길러졌다.
나이가 들면서 아픈 것 자체도 두려운데, 1인 가구라는 키워드가 추가되면 서글픈 마음까지 보태진다. 병에 따라오는 신체적 고통과 싸워야 하고, 완치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버텨내야 하며, 그 시간을 이제는 오롯이 홀로 견뎌내야 한다.
20대엔 떨어져 살아도 부모님의 보호를 받았다. 언제 어디서든 나를 위해 달려와 주실 부모님께 전화 한 통이면 혼자에서 둘이, 셋이 되었다. 하지만 40대가 되면서 이제는 병치레를 굳이 부모님께 알리지 않는다.
늙어간다는 건 마음도 함께 약해진다는 의미인 건지, 몸도 마음도 약해진 부모님께 굳이 걱정을 보태드릴 순 없다. 지금도 부모님은 워낙 비실비실한 데다 혼자 살고 있는 내가 혹여 아프지는 않을까 늘 걱정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