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음 후 라면은 찬양의 대상이었지...
Pixabay
배고픔의 달램에 비하면 생존을 위한 섭취는 임팩트가 남다르다.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해 쑥과 마늘이 필요했다면, 숙취에 감염된 좀비들이 사람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해장라면이 필요했다. 라면 한 젓가락과 한 모금의 라면 국물은 술에 절인 몸에 아직 살아 있다는 복음을 전파하는데, 해장라면을 찬양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지 싶다. 호로록 들이켜는 라면 국물에 서서히 깨어나는 몸속의 세포들. 아, 아직 살아 있구나... 조금 전까지 죽을 것 같다고 읊조리던 입에서 새삼 살겠다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아무튼, MT에서 과음 다음 날 먹던 라면은 멀쩡한 사람이 끓인 것도 아닌 데다 어기적어기적 몰려드는 좀비들을 위해 면에 면을, 물에 물을, 스프에 스프를 추가로 투척한 것이라 정상인(?)이 먹을 것이 못 됐다. 국물은 점점 걸쭉해지고 짜기는 상상 이상. 그럼에도 줄어드는 라면을 아쉬워하며 그렇게 맛나게 먹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 그만한 약이 없기도 했지만, 언제나 배고팠던 시절이 또 그때였으니까.
서울에서 혼자 생활하던 시절, 해먹을 줄도 모르고 매끼 사 먹을 돈도 없던 나는 대부분 우유에 타 먹는 시리얼이나 별다른 조리가 필요하지 않은 3분 요리에 의존했다. 먹어도 배고프던 그때, MT를 끼니 해결의 한 방편으로 참여했던 나는 그래서인지 모든 음식이 감지덕지다.
그런 경험 덕분에 어딜 가든 밥 주는 사람에겐 잘 보이려는 나지만 결코 식당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짜거나 맹탕인 음식이 나올 때면 나 역시도 손이 가질 않는다. 그저 이왕 먹을 거 애써 맛없어하면서 먹을 필요가 있을까 싶은 안타까움이다. 맛없다고 하면서 싹싹 긁어 비우는 건, 왠지 좀 서글프지 않나.
만족과 불만족
불만족은 늘 곁을 맴돈다. 그래서인지 어쩔 수 없이 배를 채우듯 뜻하지 않게 서글픔을 채우는 일이 흔하다. 어째서 평일이 일주일에 대한 지분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지, 돈 좀 불려보자고 시작한 투자는 어쩌다 간땡이만 불려 큰일을 치르게 했는지, 왜 몸은 튼튼하지 못해 무릎이 시리고 어깨가 결리는지, 내가 어쩔 수 없는 일과 쉽게 바꾸기 힘든 상황을 곱씹으면 입꼬리가 삐딱하게 내려간다.
그런 생각에 힘없이 고개를 숙일 때쯤 천천히 고개를 드는 것이 지난날의 기억이다. 직장을 구하지 못해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잠 못 들던 날들, 자칫 큰일을 치를 수 있었던 치기 어린 시절의 생각 없는 행동들. 이런 기억들이 떨어지는 고개를 받쳐 든다. 그리고 부루퉁해진 내 볼을 꼬집으며 얘기한다.
"또 배부른 생각하고 있네..."
움찔. 그제야 이루지 못한 바람이 부루퉁한 볼에서 새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