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 김한익 기념비, 함양읍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던 김한익 의사를 기리고자 함양읍 운림리 상림공원 내에 건립됐다.
주간함양
정규환 선생
수동면 상백리 출신인 정규환 선생은 1919년 11월 함양군을 무대로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전 민족적으로 전개되는 상황에서 정규환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평소 뜻을 같이하던 고재경, 정재원 등을 동지로 규합했다.
이들은 해외 독립운동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함양군 수동면 내백리에 사는 부호 차우진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11월15일 오전 1시경 차우진에게 독립운동을 하는 결사대라 소개하고 운동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차우진은 가진 돈이 없다며 음력 10월 1일에 일금 1만 원을 제공할 것을 약정했다. 정 선생은 12월 12일 약정한 군자금을 수령하기 위해 약속 장소로 갔다가 일경에 피체된다.
그는 이 일로 인해 1920년 1월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강도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1년 3월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이 악화되어 가석방되었으나 1921년 4월 16일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하종진 선생
안의면 금천리 출신인 하종진 선생은 1919년 3월 안의면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나자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며 참여했고 1922년 10월 대구고보의 맹휴운동을 주동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고문을 받았다. 1923년 5월에는 경성전차회사 파업을 주도해 민족 차별 대우에 항거하며 항일 투쟁을 펴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고 한다.
이후 1925년 9월 29일 대구 신정 이금이의 집에서 신재모, 방한상 등과 회합해 무정부주의를 실현하는 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30일에 대구 서성정 대구노동회관 내에서 진우연맹을 비밀결사했다.
그러나 1926년 5월 이금이의 집에서 회합하고 일본과 상행의 동지들과 제휴해 8월10일을 기해 상해의 고삼현으로부터 폭탄을 입수, 대구 시내의 주요 관청 폭파, 각 관서의 수뇌 살해, 번화가 점포 파괴 등을 계획했으나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1927년 7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에 집행유예 4년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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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수립일 기념, 함양에서 이루어진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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