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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나를 위한 특별한 커피의 비밀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나만의 리추얼

등록 2023.04.19 08:12수정 2023.04.1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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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편집자말]
새벽 5시, 눈을 뜨면 원두부터 갈아 천천히 커피를 내린다. 하루를 시작하는 나만의 의식.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 서버와 드리퍼를 세팅하고 종이 필터를 접어 드리퍼에 넣는다. 20g의 원두를 갈아 드리퍼에 담고 표면을 평평하게 다듬는다. 뜨거운 물을 서버에 따르고 드립 주전자로 옮겨 물의 온도를 맞추면 드리퍼 위로 소량의 물을 재빨리 뿌려 원두 가루를 적셔준다. 

마지막으로 원두 위로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서서히 커지는 원을 그리며 물을 흘려준다. 물길이 촘촘하고 균일하게 그려지도록 팔과 손에 실리는 힘과 움직임에 집중하면서. 드리퍼에 담긴 원두에 물이 차 오르고 서서히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서버에 커피가 일정량 추출되면 드리퍼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적당량의 물을 더해 입맛에 맞는 커피를 만든다. 그 사이 따뜻한 물을 부어 덥혀 놓은 머그 컵에 커피를 옮긴다. 오직 나를 위한 맞춤 커피가 완성된다.

하루를 시작하는 나만의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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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의 커피 한 잔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이자 매일 글쓰기라는 리추얼의 동반자 ⓒ 김현진

 
머그컵을 감싸 쥔 두 손을 코 앞으로 가져가 향기를 맡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뜨겁고 쌉싸름하면서 고소하고 부드럽기도 한 작은 덩어리가 입안에 머물다 목과 가슴을 덥히며 내려간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까슬까슬한 몸을 말없이 쓸어주는 움직임은 마지막 남은 잠의 기운까지 살살 털어준다.

한 잔의 커피와 함께 새 날이 시작되었음을 받아들인다. 무사히 내 자리에서 원두커피를 내리고 한 잔을 얻음에 감사하며. 아침의 커피는 안녕한 출발을 알리는 포옹, 모든 감각을 일깨우며 나를 안아주는 공감각적 메시지다. 잔을 들고 자족하며 희미하게 웃는다.

머그컵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아 처음 몇 모금을 홀짝거리는 동안은 아무 생각 없이 입안의 둥그런 덩어리를 느낀다. 비정형의 물성이 몸으로 스며들어 온기를 퍼뜨리는 감각을 쫓는다. 그건 살아있음에 대한 각성 같다. 잠이라는 매일의 죽음에서 다시 생(生)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로 깨어났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이 그날의 퀄리티를 결정하는 것 같아."


언젠가 남편에게 했던 말이다. 방심한 사이 원두가 똑 떨어진 날, 별 수 없이 인스턴트커피를 타 마셨는데 어찌나 실망스럽던지. 하루를 제대로 열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나를 온전히 대접하지 못했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무도 깨지 않은 이른 아침과 맛있는 원두커피는 하루 중 가장 욕심을 내는 조합이다. 커피 한 잔을 홀로 고요히 음미하는 일, 그때 누리는 온전한 고독을 사랑한다. 그걸 위해 달콤한 잠의 유혹을 떨치고 기꺼이 일어난다.

그 말을 했던 아침 이후 원두가 떨어지지 않게 미리 챙긴다. 배송 기간을 감안하여 주문하고 공정무역을 통해 생산한 원두를 구입한다. 커피가 생활의 중요 요소로 들어오면서 커피 재배의 실체를 조금씩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커피콩 재배를 위해 숲을 개간하고 이로 인해 동물들의 서식지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기후 위기로 재배지가 축소되면서 토지 확보를 위해 숲을 더 훼손하는 경우도 있고. 생두를 씻는 과정에서 엄청난 물을 소비하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 지구 환경을 걱정한다면 커피를 마시지 않는 결단과 실행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도시 곳곳에 문을 열고 있는 커피숍과 하루에도 몇 잔씩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커피 애호 문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장의 소비 중단보다 생산과 소비에서 바람직한 변화를 이끌고 환경 파괴를 줄일 수 있는 규제와 방법을 고민하는 게 더 실질적이지 않을까. 아직 커피를 끊을 엄두가 나지 않는 커피 애호가의 옹색한 변명 같지만 말이다.

커피를 차로 대체해보기도 했지만 커피가 아니면 채울 수 없는 2%가 존재했다. 내겐 식음의 행위보다 원두를 갈고 추출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물의 온도를 맞추고 드리퍼에 담긴 원두 표면을 고르고, 일정하게 동심원을 그리며 물을 붓는 행위까지, 하나하나의 동작이 리드미컬하게 흘러가며 명상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

딱 한 잔을 잘 마시기

커피를 내리고 나야 개운해지고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커피를 끊는 대신 원두 소비를 늘리지 않는 방향을 택해 하루에 한 잔만 마시고 있다. 한 잔을 잘 마시고 나면 더 이상 커피에 대한 갈증이 생기지 않는다. 소박한 욕망을 채워 확실한 기쁨을 누리면서 불필요한 욕심을 줄여 간다.

매일 아침 커피와 함께 글쓰기를 하는 건 나만의 리추얼이다. 거기에는 '작가다움'을 흉내내려는 몸짓도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햇살이 매혹적으로 손짓해도 책상 앞에 앉아 일정 시간 타자기를 두드리는 작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역시나 커피.

커피 한 잔에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환기와 매일 글을 쓰겠다는 다짐이 들어 있다. 커피 향이 영감을 실어다 주길, 흰 백지에 문장이라는 길을 내며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지치지 않고 나아가게 도와주길 바라는 마음도. 고독이 장소가 아니라 시간이라면, 고독을 잴 수 있는 예민한 촉이 필요한 작가에게 커피만큼 훌륭한 음료는 없을 것이다.

정해진 계획보다 우연을 더 믿게 된 지금 커피를 즐기는 생활이 영원할 거라 장담하지 않는다. 어느 날 거짓말처럼 커피와 작별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우연의 방향이 어디로 흐를지 알 수 없지만 그때에도 나는 아침을 시작하는 의식과 나를 책상과 글쓰기로 이끌어 주는 다정한 친구를 찾아내지 않을까. 

커피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고 나니 오늘은 딱 한 잔만 더 마셨으면 싶어진다. 하지만 유혹에 흔들리는 대신 최근 맛을 들인 볶은 현미를 우린 차를 내온다. 특별한 커피의 비밀은 바로 '한 잔'에 있으니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아침의커피 #나만의아침의식 #리추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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