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학교 축제에서 3학년 학생과 내가 우쿨렐레+리코더 연주를 선보였다. 이날을 위해 매일 학생과 연습하는 시간조차 얼마나 신이 났는지.
홍정희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는 특별함이 있다. 작년 재학생들에 이어 올해 신입생까지 모두 욕과 비속어를 쓰지 않으며, 핸드폰에 매여 살지도 않는다. 형, 동생 할 것 없이 전 학년이 다 같이 천진하게 잘 어울려 지낸다. 신록으로 물들고 있는 앞산과 운동장에 흩날리는 벚꽃을 알아채는 눈을 가졌으며, 기력 없어 보이는 교사에게 먼저 "선생님 괜찮으세요?"라고 물을 줄 안다.
여름 방학 날에는 친구 집 앞 계곡에서 다 같이 모여 물놀이를 하며, 겨울 방학 날에는 꽝꽝 언 계곡 그 자리에서 스케이트를 탄다. 그러곤 계곡 앞 친구 집에서 며칠씩 먹고 자며 방학을 시작하는 자신들만의 행사를 꼬박꼬박 거행한다.
갑자기 키가 부쩍 큰 친구가 주인의 풍채를 감당하지 못해 짤막해진(때론 구멍이 나 있는) 바지를 입고 와도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당사자도 자신의 옷차림에 개의치 않는 듯하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이 장면에 나는 그만 꽂히고 말았다. 어디서나 누구나 행색으로 평가받거나 놀림당하지 않으며 스스로도 위축되지 않는 세상 같아서, 우리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이미 그런 고운 가치관을 장착하고 있는 '정상적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존재' 그 자체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으로 크고 있어서, 그렇지 않은 '비정상적'인 세상이 있다는 걸 아는 어른으로서는 눈물겹도록 고맙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한 번은 어머니가 외국인인 한 녀석이 어머니 나라의 언어를 같은 반 친구들과 나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새로 배운 몇 가지 단어들을 조합해 재밌는 문장을 만들어 대화를 이어간다. 말 그대로 우리는 '다문화'를 경험하게 된다. 아주 즐겁게 환대와 공존을 마음에 새긴다.
우리 아이들의 이런 어질고 선량한 성정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내가 이곳에서 이 년째 근무하며 내린 잠정적 결론은 '심심함을 견디며 자란 환경'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디지털 네이티브임에도 불구하고 핸드폰에 코 박고 있지 않고 주변의 자연과 사람을 볼 줄 아는 그 자기조절력은 우선은 그들의 보호자들이 물려준 것일 테다. 잘 키워주셨다.
다음으로는 심심한 이곳의 환경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치킨 먹고 싶으면 배달 앱 켜서 주문하고 몇 십분 만에 집 앞에서 픽업하는 세상인데, 이곳 아이들은 치킨이 생각난다면 일단은 기다려야 한다. 주말이 되어 보호자가 시내에 나가 사다 줄 때까지 며칠씩 기다리는 게 기본값이다(물론 당일에 보호자가 사다 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배달 앱으로 주문해 받는 시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쩌다 친구가 개인적으로 시내에 나갈 일이 생기면 삼각김밥 꼭 사 오라고 당부를 거듭한다. 편의점도 치킨집도 없는 이곳은 기다리는 게 일상이다. 특별한 이벤트도 잘 없다. PC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생네컷을 찍을 수도 없으니 학교가 일찍 끝나면 음악 시간에 배운 악기 뚱땅거리고, 운동장에서 캐치볼도 했다가, 집에 가서 자전거를 타고 다시 학교로 모여 해가 질 때까지 옹기종기 또 논다. 심심한 줄도 모른 채 심심한 환경을 잘 견디고 있다.
세상은 믿을 만하다는 걸 충분히 경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