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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주목한, 독일 대통령의 통렬한 반성문

[전문] '바르샤바 게토 봉기 80주년'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연설

등록 2023.04.21 11:35수정 2023.04.2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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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일(현지시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식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후손들이 바르샤바 게토 봉기 8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무대 앞줄 오른쪽부터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 아가타 콘하우저 두다 폴란드 영부인, 이츠하크 헤르초그 이스라엘 대통령, 미하엘 헤르초그 이스라엘 영부인,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엘케 부덴벤더 독일 영부인.
19일(현지시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식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후손들이 바르샤바 게토 봉기 8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무대 앞줄 오른쪽부터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 아가타 콘하우저 두다 폴란드 영부인, 이츠하크 헤르초그 이스라엘 대통령, 미하엘 헤르초그 이스라엘 영부인,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엘케 부덴벤더 독일 영부인.연합뉴스

3.1운동이 일어난 지 80주년이 된 1999년 3월 1일. 독립기념관이 있는 충남 천안에서 3.1절 80주년 행사가 열립니다. 이 자리에 일본의 총리가 참석해 연설을 합니다. '잘 가시오 조선인들이여, 다시는 그런 재앙이 없기를'이라는 유창한 우리말로 시작한 연설에서 유관순 열사를 추모하며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에게 용서를 구하고 '저는 오늘 여러분 앞에 서서 일본군이 이곳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라며 고개를 숙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본은 이미 여러 번 사과했는데 왜 자꾸 과거를 재론하느냐며 짜증스러워하는 모양새입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회고록에 '몇 번을 사과해야 끝나는 거냐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쓴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직접 사죄를 피하려는 온갖 전략과 책임을 면하려는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모습을 보면 할 말을 잃게 됩니다. 그런 일본을 향해 독일의 사과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지난 19일은 독일 나치군이 점령한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유대인 강제거주지역)에서 유대인들이 일으킨 대규모 무장투쟁인 '바르샤바 게토 봉기' 80주년이었습니다. 1943년 일어났던 이 봉기로 인해 유대인 1만 3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게토 봉기 80년 기념식에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과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이츠하크 헤르초그 이스라엘 대통령이 함께 참석했습니다. 

독일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이곳에서 연설을 한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독일의 끝없는 책임을 통감한다며 또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습니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돌려 말하지 않았고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이름을 부르고 구체적으로 반인륜적 범죄를 거론하는가 하면 직접적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의 연설문은 A4용지 4장 분량으로 독일 연방 대통령실 웹사이트에 4개 국어(독일어, 폴란드어, 히브리어, 영어)로 올려져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혹은 잊고 싶어 하는 누구든 읽어볼 만한 연설이라 전문을 번역해 소개합니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19일(현지시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식에서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19일(현지시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식에서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바르샤바 게토 봉기 80주년
- 2023년 4월 19일 폴란드 바르샤바

"ZEIT GEZUNT CHAVEYRIM UN FREIND, ZEI GEZUNT YIDDISH FOLK, DERLOZT NISHT MER ZU AZELCHE CHURBOYNES."("잘 가시오, 친구들. 잘 가시오, 유대인들이여. 다시는 그런 재앙이 없기를.")


한때 바르샤바 게토가 있던 이곳에서 오늘 여러분에게 연설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말 대신 게토의 주인공 중 한 명이 했던 말을 이곳 바르샤바에서, 폴란드에서, 유럽에서 수많은 유대인이 사용했던 그 언어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독일인들이 말살하려 했던 그 언어로요. 화가 겔라 섹슈타인은 어린 딸 마르갈리트와 함께 트레블링카로 추방되기 전에 이 엄청난 유언과 증거를 남겼습니다.

독일인으로서 그리고 독일 연방 대통령으로서 이곳에 오는 것은 매우 필요하지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독일인들이 이곳에서 저지른 끔찍한 범죄는 저를 매우 부끄럽게 만듭니다. 하지만 독일 국가원수로서 이 추모식에 처음으로 참석할 수 있게 되어 감사와 더불어 겸손한 마음이 듭니다. 


두다 대통령님,
이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대통령님과 폴란드인 여러분들과 함께 그리고 헤르초그 대통령님, 마리안 투르스키, 크리스티나 부드니카, 엘즈비에타 피코프스카 여사님과 함께 추모에 참여하게 되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뜻깊습니다.

저는 오늘 독일 연방 대통령으로서 여러분 앞에 서서 바르샤바 게토의 용감한 전사들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슬픔과 비통에 잠긴 고인들 앞에 고개 숙입니다.

"강철 같고 무자비한 첫 추위는 이미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을, 옷가지마저 모두 팔아버려 가을날 파리처럼 힘없는 사람들을 쓸어 버렸습니다. 바르샤바 유대인들의 놀라운 생명력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끝까지, 마지막 1시간, 마지막 1분까지 울부짖으며 자신을 방어하지만, 그 1시간 그 1분이 올 것입니다."

게토에 강제로 수용됐던 레이첼 아우어바흐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몇 문장에 얼마나 많은 고통이 담겨 있는지, 얼마나 많은 슬픔이 담겨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얼마나 평정심을 유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레이첼 아우어바흐는 바르샤바의 유대인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링겔블룸 아카이브에 남아있는 그녀의 기록과 또 다른 이들의 기록 덕분에 우리는 나치가 이곳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와 그들이 없애버린 세계에 대한 기억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레이첼 아우어바흐는 "한 도시가 파괴되고 한 민족이 파괴되었다"라고 썼습니다. 게토의 높은 벽 뒤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겪은 공포에 대해 읽어보면 충격적입니다. 지옥에서 바로 가져온 보고서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간직한 힘과 인간애, 용기에 대해 읽는 것은 깊은 감동을 줍니다. 위대한 마레크 에델먼이 가슴 아프게 회고했듯이 게토에는 사랑도 존재했습니다.

바르샤바 게토의 영웅인 모르데하이 아니엘레비츠, 마레크 에델먼, 이츠하크 주커만 등 많은 젊은이들은 암흑 속에서 상상할 수 없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존엄성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잔혹한 불의, 독재와 테러, 살인에 대항해 일어섰습니다. 그들의 용기는 바르샤바를 넘어 다른 이들에게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용기는 지금도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레이첼 아우어바흐와 마레크 에델먼은 게토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 중 한 명입니다. 그들은 평생 동안 자신들이 증언하는 것을 임무로 여겼습니다. 레이첼 아우어바흐는 이스라엘에, 마레크 에델먼은 여기 폴란드에 있습니다. "살아남은 우리가 이것을 여러분께 남기는 것은 이 기억이 [...]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기억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입니다. 위대한 프리모 레비의 말처럼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의무입니다. 그것이 폴린 박물관이 맡은 의무입니다. 폴란드와 유럽에서 유대인의 삶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삶은 다시 번성했고 앞으로도 계속 번성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독일인들이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겔라 섹슈타인, 레이첼 아우어바흐, 마레크 에델먼, 모르데하이 아니엘레비츠, 에마누엘 링겔블룸, 오늘날 독일에서 그들의 이름을 아는 이가 있을까요? 독일군이 점령한 폴란드, 이곳 바르샤바 게토에서 저지른 범죄를 반성하는 것은 우리 기억에서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해야 마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곳에 온 것이 저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우리 독일인들이 우리의 책임을 인식하고 있고, 생존자와 사망자들이 우리에게 남긴 의무를 알고 있다고 말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우리 독일인에게 역사가 부과한 책임에 대해 그 어떤 한계도 둘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를 위한 경고이자 의무로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독일은 폴란드를 침략했습니다. 독일군은 1939년 9월 1일 비엘룬을 공격했습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고 우리는 4년 전 비엘룬과 이곳 바르샤바에서 함께 추모한 바 있습니다. 수백만 명의 폴란드인을 비롯해 5000만 명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은 전쟁이었습니다. 이곳과 유럽 동부에서 벌어진 이 전쟁은 잔혹한 학살 전쟁이 되었고 만행으로 이어졌습니다. 

독일군은 '쇼아'(Shoah, '절멸'이란 뜻의 히브리어로 홀로코스트를 의미)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독일군은 유럽의 유대인과 바르샤바의 유대인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잔인함과 비인간성으로 박해하고, 노예로 삼고, 살해했습니다. 게토 청산의 주 책임자인 잔인하고 냉소적인 도살자 위르겐 스트룹이 제가 태어난 도시 출신이라는 사실은 역사적 우연이지만, 저로 하여금 지옥 같은 바르샤바 게토와 희생자들, 그리고 악마 같은 가해자와 공범들에 대해 거듭 생각하게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책임을 진 가해자가 너무나 적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 앞에 서서 독일인이 이곳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두다 대통령님, 헤르초그 대통령님,
폴란드와 이스라엘 두 나라의 많은 분들이 쇼아라는 반인륜적 범죄에도 불구하고 우리 독일인들에게 화해라는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선물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대할 수도 없고 기대할 권리도 없는 선물이었습니다. 이 선물이 있었기에 폴란드와 독일, 이스라엘과 독일이 깊은 우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양국 간의 우정은 정말 기적적인 성과입니다! 독일이 저지른 전대미문의 범죄 이후 기적적인 일이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과거의 심연을 가로질러 서로에게 손 내밀었던 이스라엘인, 폴란드인, 독일인들의 용감하고 피나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이스라엘 국가가 건국된 지 75년, 폴란드 주교들의 서한이 나온 지 거의 60년, 빌리 브란트가 이 광장에서 무릎을 꿇은 지 50여 년, 당신의 아버지인 차임 헤르초그가 독일을 처음 국빈 방문한 지 거의 40년이 지난 오늘, 친애하는 안제이, 친애하는 부기, 우리는 이 역사적인 장소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기적적인 화해의 성취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받아들이기 위해 여기에 섰습니다. 저는 우리 세 사람 모두 같은 약속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적적인 화해의 성취를 보존하고 미래로 이어가야 하며, 또 그렇게 할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Nigdy więcej(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לעולם לא עוד(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인종차별적 광신주의, 다시는 무분별한 민족주의, 다시는 야만적인 침략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공유하는 유럽의 기초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추모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는 국제법을 존중하고 자유와 민주주의 안에서 모든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이라는 공동의 가치와 공동의 미래를 믿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평화롭고 민주적인 이웃 국가에 대한 불법적인 공격으로 이러한 가치를 조롱하고 유럽 안보 질서의 근간을 파괴했습니다. 러시아 대통령은 국제법을 위반하고 국경을 문제 삼으며 영토를 강탈했습니다. 이 전쟁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폭력, 파괴와 죽음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폴란드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여러분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하고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경계하고 방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 독일인들도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었습니다. 다시는 안 된다는 것은 유럽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벌인 것과 같은 잔인한 침략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는 안 된다는 것은 우리가 폴란드와 다른 동맹국들과 함께 우크라이나 편에 굳건히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폴란드와 다른 동맹국들과 함께 우크라이나에 인도주의적, 정치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안 된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우리가 함께 단결해 행동할 때 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제가 우리 역사가 부과한 책임에 대해 말할 때 의미하는 바입니다. 우리 독일인들은 평화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이 책임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몇 달 동안 양국의 자유민주주의가 더욱 가까워졌다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우정은 이제 더욱 굳건한 토대 위에 놓여 있습니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비가 있는 이 광장에서 저는 슬픔과 겸손한 마음으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저는 과거의 범죄에 대한 우리의 책임과 우리가 공유하는 미래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확인합니다!

감사합니다.
#독일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봉기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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