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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몸에 촘촘히 새겨주고 싶은 기억

계절을 즐기는 건 인생을 즐기는 것...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삶의 기술

등록 2023.05.05 11:25수정 2023.05.05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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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편집자말]
바야흐로 봄이다. 어린 시절 봄밤이면 집 근처 어린이대공원으로 벚꽃 구경을 가곤 했다. 꽃만큼이나 사람이 많았더랬다. 며칠 새 지고 말 봄꽃의 아름다움을 간절히 헤아릴 줄은 몰랐지만 엄마 아빠 따라 나들이 가는 저녁이 특별하다는 건 알았다. 거리는 사람들로 술렁였고, 어둠이 내리는 저녁 공기 사이로 달큼한 향기가 번졌다.  

봄이 되면 떠오르는 또 다른 기억 하나. 엄마는 나들이 때마다 비닐봉지와 칼을 챙겨 쑥을 뜯었다. 머리가 작을 때는 쑥 뜯는 엄마 곁에서 "이게 맞아?" 하며 거들었는데 나중엔 그만 좀 캐라고 잔소리만 하고 나 몰라라 했다. 엄마는 혼자서도 한참을 쪼그려 앉아 쑥을 뜯었다. "어머나, 쑥이 이렇게 많네! 얘, 이것 좀 봐라!" 하며 연신 감탄했고.


그 쑥으로 엄마는 된장 풀어 쑥국 끓이고 찹쌀가루 버무려 쑥 버무리를 쪄 주었다. 새로 돋아난 쑥은 여리고 보드라웠고 된장과 잘 어울렸다. 쑥에서 초록빛이 풀어져 나오는지 국은 색이 짙고 걸쭉했는데 밥을 말아먹으면 반찬 없이 한 그릇 뚝딱할 수 있었다.

떡이라고 할 수도, 나물이라고 할 수도 없던 쑥 버무리는 달달하고 향긋해 좋아했던 간식. 쑥에 찹쌀가루와 설탕을 버무려 찌면 초록 줄기에 새하얀 백설기 조각이 얼기설기 붙어 있는 형태가 되었다. 어릴 때라 쑥 버무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봄이 입으로 들어오네, 계절을 잘 나고 있네, 이런 생각을 하진 못했겠지?

의식하지 못하는 새 체화되는 습관처럼 계절을 맞고 제철 음식을 챙겨 먹으며 자랐다. 여름밤이면 엄마 심부름으로 골목 끝에 있는 슈퍼로 달려가 두 손으로 껴안아야 들 수 있는 커다란 수박을 날랐고, 가을부터 겨울 사이에는 외가에서 보내준 단감을 질리도록 먹었다. 선풍기 바람 앞에서 먹던 찐 옥수수나 참외, 뜨끈한 방바닥에 엎드려 먹던 삶은 밤이나 고구마. 계절은 음식과 함께 몸에 쌓였다.

계절의 기억을 음식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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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담은 타르트 시간과 기억은 음식과 더불어 우리 곁에 남는다. ⓒ 김현진

 
그래서일까. 몇 년 전 베이킹 클래스를 운영할 때 철마다 수업 준비를 하는 게 즐거웠던 건. 다음 계절에 나오는 과일이 무언지, 그걸로 뭘 만들면 좋을지 고민하는 시간은 매번 설레고 재미있었다.

가을이면 사과 타르트와 단호박 파이를 굽고 겨울에는 첫 딸기로 딸기 케이크를 만들었다. 봄이 한창일 때엔 산딸기 타르트를, 여름이면 체리, 블루베리, 복숭아와 청포도 등 온갖 과일로 타르트와 케이크를 장식했고.


수업의 이름은 '계절 담은 타르트(케이크)'였다. 제철 과일을 맛있게 먹으며 계절을 차곡차곡 몸에 담고 싶었다. 그런 시간이 우리를 어루만져 건강하게 해주고 온기와 다정을 더한다고,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지나가지만 기억만은 음식과 더불어 우리 곁에 맴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커다란 성공이나 엄청난 부를 누리는 것보다 일상에서 소소한 기쁨을 적극적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내가 생각하는 작은 기쁨이란 그날의 햇볕과 바람을 맞고 매일 하늘 한 번 올려다 볼 여유를 갖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모여 앉아 소박한 밥상을 맛나게 먹는 일이다.

봄에는 꽃피는 걸 보고 여름에는 물놀이를 하고, 가을엔 단풍이 얼마나 짙은지 헤아리고 겨울엔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눈싸움을 하는 것. 당연해서 뻔한 걸 하며 나무처럼 몸과 기억에 나이테를 새긴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철마다 그때 할 수 있는 일, 시절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즐긴다. 계절의 흐름 안에서 때마다 찾아오는 즐거움을 누린다. 계절과 자연과 연결될 수록 삶에 안정감을 얻고 근원적인 행복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계절을 즐기는 건 인생을 누리는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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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와 한 달에 한 번씩 홈베이킹 시간을 갖는다. ⓒ elements.envato

 
지금이라는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가능한 희희낙락한 일을 고민하기. 이건 내가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삶의 기술이기도 하다. 클래스를 그만두고 집에서 베이킹 하는 일이 줄었지만 딸아이와 한 달에 한 번씩 홈베이킹 시간을 갖는다.

우리끼리는 그걸 매달 하는 생일파티라고 부른다. 어떤 날은 간단히 쿠키를 굽고, 또 다른 날은 컵케이크를, 때로는 진짜 생일 케이크를 만들기도 하면서.

지난 2월에는 남편 생일을 위해 딸기 케이크를 만들었다. 딸아이 생일이 있는 5월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블루베리로 케이크를 구울 것 같다. 아참, 딸기 좋아하는 나와 딸에겐 봄 가기 전 딸기잼 만드는 일도 연례행사 중 하나.

딸기 가격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커다란 박스로 딸기를 사 들고 오며 우리는 신이 나서 떠들어대겠지. 손질한 딸기가 담긴 솥에 설탕, 레몬 넣어 끓이는 사이 집안 가득 향긋한 냄새가 차오를 테다. 아이는 요리사가 된 것 마냥 기다란 주걱을 들고 휘저을 테고. 완전히 졸아들지 않아도 한 번만 먹어 보자며 성화일 게 뻔하다. 우리는 냄비 앞에 선 채로 갓 끓인 딸기잼을 빵에 올려 '호호-' 불어 가며 먹겠지.

그런 찰나는 아이 인생에서 손톱만큼 짧을 테지만, 해를 거듭하는 사이 실처럼 길게 이어지지 않을까. 인생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씨실이 되어 아이는 딸기를 볼 때마다 엄마와 웃던 기억을 회상하지 않을까.

아이에게 주고 싶은 선물은 이런 순간이다. 생활을 둘러싼 작고 사소한 것에 마음을 기울이고 사랑하기, 철마다 걷고 보고 먹으며 자잘한 즐거움을 체험하길 미루지 않기. 그랬던 순간의 기억을 아이의 몸에 촘촘하게 새겨주고 싶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행복할 가능성은 없다. 행복은 체험이다. 많이 겪어본 사람이 더 자주, 쉽게 겪을 수 있다. 유년에 저금해 둔 행복을 한꺼번에 찾아 즐겁게 누리는 어른을 본 적이 없다."
- <고요한 포옹> 박연준, 마음산책

어린 시절, 삶을 누리는 법을 전수시키려고 부모님이 봄이면 쑥 캐서 국 끓여 주고 해마다 꽃놀이에 데려갔던 건 아닐 것이다. 당신이 좋아하고 즐기는 일을 자연스레 되풀이 하는 사이 내게 계절 감각이라는 게 형성되었겠지. 소소한 생활이 축적되어 나와 계절 사이에 씨실이 엮였다. 그 실을 연장해 아이에게 건네 준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음식의기억 #제철음식 #엄마음식 #계절을먹는일 #인생을즐기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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