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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아일랜드 동네 식당 아침 메뉴

엄마표 집밥 한상 '풀 아이리시 블랙퍼스트'가 여행자에게 주는 위로

등록 2023.05.11 16:55수정 2023.05.11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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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세계여행을 나섰습니다. 여행지에서의 한 끼 식사를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음식 한 접시는 현지인의 환경과 삶의 압축판이요 정체성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매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기자말]
여행을 떠난다니 다들 부럽다고 했다.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지 몰라도 여행 일상이 매 순간 낭만적이고 행복하지는 않다. '나에게 한 끼 먹이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일일 줄이야! 여행 삼 주째. 한 곳의 음식에 익숙해져 겁 안 내고 식당 들어갈 만하다 싶으면 '나라와 도시 옮기기'를 반복하고 있다.

먹는 문제에 비하면 관광 거리를 찾는 것은 쉽다. 서 있는 지점에서 인터넷 지도만 누르면 갈 곳을 반짝반짝 잘도 표시해 준다. '돌밥 돌밥'이라고 했던가. 낯선 나라, 언어와 음식이 다른 곳에서도 어김없이 돌아서면 밥 때다. 입에 맞는 음식을 자유자재로 골라 먹던 홈그라운드가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체코 프라하에서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넘어온 지 사흘째다. 며칠 겪은 더블린 날씨는 소문대로 하루에 사계절이 다 들어 있었다. 한나절 동안 비 왔다 해 났다를 수없이 되풀이했고 기온도 오르락내리락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날씨 탓인지 목도 따갑고 콧물도 흐른다. 집 나서면 고생이라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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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가 있었던 더블린 핑글라스 지역 주택가 ⓒ 김상희

 
감기 기운을 핑계로 관광 일정을 없애고 느지막이 동네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기로 했다. 숙소가 더블린 교외 주택 단지에 있어 식당은 편의시설이 모인 곳까지 한참 걸어가야 했다. 조용한 주택가에 사람 하나 없더니 식당에 들어서자 동네 사람들은 다 모인 듯 시끌벅적하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일요일 오전에 이런 곳에 와서 브런치도 먹고 사교도 하는 것 같았다.

내 앞에 서빙된 메뉴는 풀 아이리시 블랙퍼스트(Full Irish Breakfast)였다. 큰 접시에 음식이 한가득이었다. 토스트, 소시지, 토마토와 양송이, 달걀프라이, 베이컨, 해시브라운, 블랙 푸딩(Black Pudding)과 화이트 푸딩(White Pudding), 무려 아홉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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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식당에서 받아 든 '풀 아이리시 블랙퍼스트(Full Irish Breakfast)' ⓒ 김상희


등굣길 성장기 학생에게 엄마가 이것저것 챙겨주는 든든한 아침밥 한 끼가 연상되었다. "소시지도 먹어봐, 버섯도, 토마토도 몸에 좋단다." 이 아일랜드식 엄마표 집밥 한 상은 아침 한 끼로 하루 열량을 다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꽉 찬 구성이다. 그래서인지 이름도 '풀 블랙퍼스트(Full Breakfast)'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 준비해 봤어'라고 말하는 듯 영양가 있는 음식은 죄다 모아놓은 종합선물세트였다. 우리나라 순대처럼 선지를 넣어 만든다는 블랙 푸딩이 신기했고 감자를 잘게 다져 모양을 잡아 튀긴 해시 브라운(Hash Browns)이 입에 맞았다. 감기 치료의 기본은 '잘 먹고 잘 쉬어야 한다'인데 감기가 반쯤 건너간 기분이다.

아침 식사의 양대 구분법인 잉글리시 블랙퍼스트와 컨티넨털 블랙퍼스트를 들어본 적이 있다. 잉글리시 블랙퍼스트는 달걀과 소시지를 곁들인 푸짐한 아침 식사를, 컨티넨털 블랙퍼스트는 프랑스 등 유럽 대륙 사람들이 빵과 커피로만 먹는 간단한 아침식사를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먹은 식사는, 분류하자면, 잉글리시 블랙퍼스트에 가깝다.

아일랜드에 와서 처음 놀란 점은 버스 표지판에 두 개의 언어를 쓴다는 점이었다. 아일랜드어 게일어와 영어였다.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영국군의 총부리 앞에서 게일어로 대답하며 저항하는 아일랜드 청년이 떠올랐다. 

아일랜드는 영국 식민지 800년을 거치면서 영어가 보편화되었지만 게일어는 여전히 아일랜드의 자존심이다. 영국과 오랜 기간 얽힌 관계와 문화적 지리적 공통점 때문에 영국과 음식 문화도 닮았다. 그러나 아일랜드인들이 즐겨 먹는 조식은 어디까지나 '아이리시 블랙퍼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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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어와 영어로 교대로 안내하는 버스 정류장 안내판 ⓒ 김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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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안의 안내 문구도 영어와 게일어를 같이 쓴다. ⓒ 김상희


아이리시 블랙퍼스트는 더블린 시내 식당이나 카페에서 점심 때까지 브런치로 판매하는 곳이 많았고 어떤 식당은 아예 정식 메뉴 '풀 아이리시 블랙퍼스트'란 이름으로 하루종일 팔기도 했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사람 소리로 가득 찬 동네 식당을 나서니 발걸음만큼은 현지인이다. 딱히 살 것도 없으면서 슈퍼마켓을 한 바퀴 돌아 컵과일 한 통을 사서 나왔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일요일 오전도 괜찮다. 숙소 가는 길에는 카페에 들러야지. 우리 동네 더블린 핑글라스(Finglas) 커피 맛은 어떨지, 우리 동네 카페에는 누가 와있을지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아일랜드여행 #더블린여행 #아일랜드음식 #더블린음식 #아이리시블랙퍼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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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여행자입니다. 여행이 일상이고 생활이 여행인 날들을 살고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과 기억을 '쌓기 위해'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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