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중고거래 하다 만난 사람

세상은 넓고 사람은 참 다양하다는 진리를 다시 깨닫다

등록 2023.05.08 14:56수정 2023.05.08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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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이상 다니던 직장을 조기 퇴사한 후, 이제 2년 차. 작년에는 아이 입시로 바쁘고 불안한 시간을 보냈지만, 올해 들어서니 슬슬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직장 다녔을 적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중고 거래, 챗GPT, 블로그 글쓰기, 유튜브 만들기 등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기로 결심했다. 그 중에서도 중고거래가 심심함을 제일 많이 달래주는 활동이었다.

물론, 새벽에 톡 보내기, 가격 명시했는데 그냥 무료로 달라고 떼쓰기, 옷 크기를 물어보고는 색깔이 맘에 안 든다며 거절하기, 집에 가서 다시 연락해준다면서 잠적하기 등 짜증스러운 상황도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회사에서 경험한 불쾌한 일들이 떠올라 분노가 치밀었다. 대부분의 거래 상대는 나에게 감사하다고 웃으며 인사했지만 그래도 언제 진상을 만나게 될지 몰라 불안했던 건 사실이다.

얼마 전, 새벽 4시 반에 톡이 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구입할게요."


아침 7시에 일어난 나는 한숨부터 나왔다. 상대는 자녀가 많은 젊은 주부로 보였는데, 새벽에 외롭고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말 걸고 싶어 했나보다 하며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억지로 대답했다.

"네, 반갑습니다~"
"일단 예약해 주세요, 낮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여러 번 속았던 말들 아닌가? 잠수 타기의 전형이다.

"저는 낮에 일해서 연락이 어려워요. 몇 시 이후 만날 수 있는지 알려주시겠어요?"

평소 못하는 거짓말까지 하며 강하게 밀어붙였다.

"낮에 일하시니까 저녁에 만나요. 퇴근하고 오셔서 연락해주세요."

이 사람은 계속해서 약속시간을 분명하게 정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외출할 일이 생긴 것도 있어서 그 사람 말대로 저녁에 만나기로 하고, 퇴근 후에 내가 연락하기로 했다.

볼일을 끝내고 저녁 6시에 그 사람에게 톡을 넣었다. 잠수타리라고 예상했던 거와는 달리 1분도 안 되어 대답이 왔고, 7시에 만나자고 약속했다. 판매하고자 했던 시계는 완충재를 싸서 가방에 넣었다. 그리 좋은 제품이 아니라서 저렴하게 내놓았지만, 혹시 마음에 안 들어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6시 45분쯤 미리 도착해서 판매 물건도 다시 확인하고, 운동기구로 몸을 풀며 기다렸다. 근데 7시가 되어도 오지 않았다. 이제껏 지각한 사람은 보지 못했는데, 역시나 속았다며 화가 나 있었다.

이때, 연세 지긋한 여성분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거 아닌가. 지각에 대한 아무런 말도 없이 시계를 보여달라며 환하게 웃었다. 상상과는 다른 모습에 당황한 나는 별 말없이 시계를 보여주었다.

"어머나, 막둥이 고 3녀석이 좋아하겠다. 다른 형제들도 서로 하겠다며 싸우는 거 아닌지 몰라... 호호~~"

갑작스러운 칭찬에 또 당황한 나는 물끄러미 그 사람이 손에 쥔 지폐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래금액 3000원과 함께 다른 쪽지도 보였다. 돈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자, 그 사람은 돈과 함께 그 쪽지도 주며 말했다.

"제가 믿는 종교, 당신도 믿었으면 좋겠어요."

새벽에 톡을 보내는 이유, 약속시간을 왜 저녁에 정하는지, 지각의 이유 등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더 길어질 거 같아 도망치듯 나왔다. 정말 당황스럽다는 말밖에는…. 직장 생활도 백수 생활도 결론은 하나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참 다양하다는 것.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중고거래 #퇴사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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