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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대문형무소 전시실엔 조선공산당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없을까

[황광우의 역사산책13] 1935년 수감자가 1만9천여명... 조상들은 일제를 묵인하지 않았다

등록 2023.05.11 09:25수정 2023.05.11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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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6일 오후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시민들이 전시관을 살펴보고 있다. ⓒ 연합뉴스

 

종로엔 가도 종묘엔 가지 않았다. 이불 보따리를 등에 지고 종로의 인사동 독서실에 입실했던 1975년 7월 어느 날 이후, 파고다 공원을 지나 낙원상가의 어두침침한 골목을 지나 종로학원에 다니면서도 나는 바로 옆에 종묘가 있는 줄 몰랐다.

1987년 12월 민주진영이 양분되어 민주진영의 패배가 불을 보듯 명확한 절체절명의 위기의 시기, 나는 이애주 누나랑 임진택형과 함께 백기완 선생을 모시고 단일화를 통해 민주연립정부를 세우자며 대학로 거리에서 군중집회를 열었다. 백척간두에 선 민주주의를 구하고자 집결한 20만 명의 대오는 종로5가를 거쳐 그냥 시청으로 갔다. 그때도 종로 4가에 종묘가 있는 줄 까마득히 몰랐다.

돌이켜 보면 삶은 후회투성이다. 아, 그때 우리에게 시적 상상력이 있었더라면, 그때 종로4가 종묘 앞에서 멈추어 서서 "한낮의 하늘에 부조되는 장엄한 무늬"(장석, <풍경의 꿈>)를 보라! 역사를 이끄는 민중의 장엄한 무늬를 보라"고 외칠 것이었는데….

서울엔 가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엔 가지 않았다. 지난 4월 30일 역사관 근처에서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 창립대회가 열린다길래 나는 마침내 서대문형무소에 갔다. 동행하던 이가 물었다. "작가님은 서대문교도소에 살지 않았나요?"

"제 친형인 황지우 시인이 이곳에서 두 차례 옥고를 치렀어요. 1973년 10월 서울대생들이 시위를 했는데, 그때 형이 앞장을 서다 이곳에 수감되지요. 그때 형은 독립투사처럼 위대하게 보였어요. 1980년 6월, 형은 성북경찰서에 구금돼요. 보름 동안 고문을 당하고, 시체가 되어 서대문교도소에 또 수감되죠."

이곳을 거쳐 간 민청학련 선배들을 떠올리면서 역사관 안으로 들어섰다. 판사는 스물한 살의 대학생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민중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이 모자란 청년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죽을 기회를 주시다니 더없는 영광입니다." 참으로 겸허한 청년이었고, 참으로 담대한 청년이었다. 이 청년의 이름이 김병곤인 것을 요즈음 청년들은 알까?


박정희는 민청학련의 배후로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였다. 1975년 4월 8일, 사형을 선고한 다음 날 사형을 집행하여 버렸다. 무지막지한 짓이었다. 인혁당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폭로한 시인이 있었다. 그 시인은 교도소의 문을 나서자마자 기자회견을 열어 여정남, 이수병 등 8인의 젊은 목숨이 박정희의 희생물이었음을 만천하에 폭로하였다. 그 시인의 이름이 김지하인 것을 요즈음 청년들이 알까?

시인은 다시 투옥되었다. 시인의 목숨을 앗아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 시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선 3인의 결사대가 있었다. 삼총사는 김정남과 조영래 그리고 전병용이었다.

작전은 이랬다. 김지하는 옥중에서 양심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한다. 김정남은 교도관 전병용에게 줄을 댄다. 전병용은 시인의 선언문 초안을 교도소 밖으로 빼낸다. 조영래는 시인의 짧은 글을 씨실로 삼아 정교한 논리로 엮어 선언문을 완성한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선언문이 김정남에게 전달된다. 김정남은 다시 가톨릭 신부들과 접선한다. 신부들은 시인의 양심선언문을 전 세계에 알린다. 참으로 신출귀몰하고 용감한 쾌거였다.

그런데 그 시절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쳤던 형들이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김병곤형도 갔고, 나병식형도 갔다. 윤한봉형도 갔고, 김남주형도 갔다. 부르고 싶은 그리운 형들이여… 작년엔 빛고을의 민주투사 박형선형마저 갔다. 형들의 죽음에는 취조 과정에서 당한 고문이 연관되어 있다.

서대문형무소에 들어선 역사관은 형무소의 원형이 보존되어 감동적이었다. 어린이들이 해설사의 말에 귀를 쫑그리며 듣고 있었다.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선생의 영정이 실물 크기로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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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시민들이 옥사를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전시실 안으로 들어섰더니 도표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이곳을 보세요!!!" 외쳤다. "1935년 수감자가 1만 9천 명이나 되지요." 나는 이 숫자의 의미를 풀이하였다.

"1979년 박정희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때, 투옥된 시국사범이 1천여 명이었어요. 그렇게 탄압하다가 박정희가 죽지요. 1986년 전두환 독재가 우리의 숨통을 조일 때 투옥된 시국사범이 5천여 명이었어요. 그래서 국민은 전두환을 몰아내는 거요.

이것 보세요. 1911년 이래 해마다 1만 명 이상이 투옥되었어요. 조상들은 일본의 강점을 묵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930년 이후부터는 투옥자가 1만 7천 명으로 불어나요. 1937년이면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죠. 전시체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옥자는 무장무장 늘어납니다.

아들이 감옥에 가면 어머니는 통곡하고 말 없는 아버지는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형님이 투옥되면 동생이 투쟁을 결의합니다. 온 집안 식구들이 편히 잠을 자지 않습니다. 동네 청년이 수감되자 소안도 주민 2천 명은 한겨울인데도 불을 떼지 않았고, 이불을 덮지 않았다고 해요. 청년 한 명이 투옥되면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그 고통을 함께합니다.

신채호의 표현 그대로 "삼천리 방방곡곡이 찍도 짹도 못 하는 감옥"이었지요. 아, 선배들의 항거는 위대하였고, 순국의 행렬은 숭고하였습니다."

*** 유감: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시실에는 상해임시정부도 있고, 신간회도 있는데 독립투쟁의 대들보 조선공산당이 없다. 6.10만세운동도 있고, 원산총파업도 있는데 1930년대 독립운동의 새 장을 연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없다. 독자들에게 부탁한다. 역사관에 전화를 하여 이 점을 보완할 것을 요청해주시라. 02-360-8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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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황광우는 베스트셀러 <철학콘서트>의 저자이다. 1980년대에는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와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을 집필하여 민주화운동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교 시절 첫 옥고를 치른 이래 20대에는 학생운동에, 30대에는 노동운동에, 40대에는 진보정당운동에 땀을 흘렸다. 지금은 인문연구원 동고송과 장재성기념사업회를 이끌면서 역사정신과 인문정신을 탐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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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황광우

 
#서대문형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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