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시 스스무
오이시 스스무
- 1919년 어떻게 외조부 후세 다쓰지가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인권변호사가 된 것인지?
"외조부는 어려서부터 논어 등 중국고전을 공부했고 항상 중국과 한국을 사랑했다. 그 영향인지 그는 항상 다른 민족이나 인종에 대한 차별을 반대했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과 애정이 많으셨다. 특별히 당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상태로 놓인 것에 일본인으로 큰 부끄러움을 느끼셨고, 그런 상황에 분개하셔서 결국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무료 변론을 맡으신 것이다."
-
외조부 후세에 대해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있는지?
"물론 많다. 어려서부터 나는 외조부와 한 집에서 살았다. 내가 18세가 되던 1953년 외조부가 돌아가셔서 나는 그때까지 외조부의 모습에 대해 상세히 기억한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외조부는 어린 시절부터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대해 들으면서 전쟁과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가지졌다고 하셨다.
외조부가 어릴 적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에 파병된 동네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당시 조선인들을 어떻게 학살했는지 경험을 영웅담마냥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고 하셨다. 당시 외조부는 그런 슬프고 끔찍한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일본 어른들과 그걸 재미있게 듣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너무나 참을 수 없었다고 내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 어머니가 외조부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 중 생각나는 것은?
"어머니는 외조부의 맏딸이셨다. 그래서 외조부가 조선인들을 돕다가 일본 감옥에 수감되셨을 때 어머니에게 감옥에서 많은 편지를 보내셨고 어머니는 내게 그 편지들을 읽어주시곤 하셨다.
외조부는 1932년, 일본공산당에 대한 일본정부의 탄압이 거세던 시절에 법정에서 공산당 탄압을 강력하게 비판하셨다. 그러다가 '법정모독'으로 징계를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셨다. 그 후에도 2번이나 더 변호사 자격 회복과 박탈을 반복하셨다. 또한 외조부는 일본의 신문지법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두 차례 선고 받아 복역하셨다."
일본 정부 가차 없이 비판... 변호사 자격 박탈에, 복역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