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사 창립군중대회가 열렸던 삼원포 추가가 대고산 현재 모습
박도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구축하려는 것은 지리적으로 국내와 가깝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고대로부터 한민족의 강역이었다는 '고토(古土)의식'도 크게 작용했다.
"만주는 단군 성조의 영토이며 고구려의 강역이라, 비록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복식과 언어가 같지는 않지만 선조는 동일종족인즉, 이역(異域)이라고 할 수 없다."(<석주유고>)
그러나 현실은 막막했다.
예상보다 겨울 추위가 혹독하고 농지는 비좁았다. 토착민들의 외래인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상룡과 일가는 이같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림터를 일궈야 했다.
이즈음 신민회의 멤버인 이회영 6형제가 역시 솔가하여 유하현 삼원보의 추가가에 자리잡았다. 또한 같은 안동출신 김동삼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에 큰 인물들인 이동녕·김창환·여준·주진수 등이 속속 모여들었다.
생존 자체가 어려운 환경이지만 이들은 1911년 4월 삼원보 대고산에서 이주동포 300여 명이 모여 노천대회를 열었다. 국내에서 신민회 등 계몽운동 단체에 속했던 이들이어서 이주 동포들이 함께 참여하는 일종의 군중대회(노천대회)를 열고 향후 과제를 논의한 것이다. 이 대회에서 서간도지역 최초의 한인자치기관인 경학사 설립에 합의한다. 경학사는 이후 독립운동 단체의 모태 역할을 하였다.
여기서 논의한 내용은 첫째, 민단적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를 조직할 것. 둘째, 전통적인 도의에 입각한 질서와 풍기를 확립할 것. 셋째, 개농주의(皆農主義)에 입각한 생계방도를 세울 것. 넷째, 학교를 설립하여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할 것. 다섯째, 기성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장교로 삼고 애국청년을 수용하여 국가의 동량인재를 육성할 것 등이 합의되었다.
5개 항에 뜻을 모은 이날 노천대회는 이어서 경학사 사장에는 이상룡을 추대하고 내무부장 이회영, 농무부장 장유순, 재무부장 이동녕, 교무부장 유인식을 선출하였다.
경학사는 이름 그대로 낮에는 농사를 지어 주민들의 생계를 도모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곳이었다. 다만 '밤의 공부' 중에는 야간 보행을 비롯하여 군사훈련이 따랐다는 점이 달랐다. 낮에 군사교련을 하다가는 중국 측의 공연한 오해를 살 것이기에 야간을 택해 실시한 것이다.
경학사를 설립하면서 <경학사 취지서>를 발표하여 조국광복의 방략을 내외에 반포하였다. 취지서는 사장인 이상룡이 집필한 것이다.
<경학사 취지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경술국치 이전 한국의 역사를 설명하였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한민족은 문화민족이며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으나 피의 항쟁을 전개하여 물리치고 오늘에 이르렀음을 강조하였다.
둘째는 한민족이 나라를 잃어 생존의 터전이 없어졌음을 한탄하고 그 책임은 민족 개개인에게 있음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이 절박한 시기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결과 같은 소극적인 방법은 침략자 일제에게 유리함을 줄 뿐임으로 그리스가 터키로부터 독립하였듯이 무장투쟁의 방법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 방략은 삼태기로 흙을 날라 태산을 만들 듯이 점진적인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하자고 주장하였다.
셋째는 민족 구성원 모두가 스스로 와신상담해 힘을 길러 독립전선에 앞장 설 것을 주장하였다.
넷째는 재만 한인들이 이와 같은 정신으로 경학사를 중심으로 단결하면 기필코 조국광복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언하고 있다.
〈경학사 취지서〉의 일부를 소개한다.
뜻이 있고 마음이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지만, 비록 영웅이라 할지라도 팔짱끼고 가만히 있으면 상제의 노여움을 살 것이다. 그러니 우리 산하를 향해 슬퍼 노래하면서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장강에 임해 맹세하기를 국가가 깨끗하지 않으면 고국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언어가 다르다고 하나 그래도 동족들이니 우리를 의심하지 않으며, 사정을 다 말하기 어렵고 때로는 동병상련하지 못하는 바도 있으나 희망을 양식으로 삼으면 음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며, 곤란을 초석으로 삼으면 마침내 집을 건축할 것이다.
이에 남만주 은양보(恩養堡)에 여러 사람들의 뜨거운 마음을 합해 하나의 단체를 조직하니 이름을 경학사(耕學社)라 한다. 경(耕)이라 하는 것은 다만 인명을 보전시켜 줄 뿐만 아니라 민지를 개발하는 것이기에 경(耕)과 공(工)과 상(商)은 비록 다르지만은 통틀어서 실업계의 부속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체력과 덕력을 겸비케 함으로써 스스로 가르침의 과조(科條)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앞길이 너무 멀다고 근심하지 말지어다. 한걸음이 끝내는 만리 길을 가게 하는 것이다. 규모가 이제 만들어짐을 슬퍼하지 말 것이니 삼태기의 흙이 쌓여 태산이 되는 것이다.(<석주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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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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