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게 해석을 요하지 않고, 반복적인 형식의 아름다움, 공감되는 내용을 통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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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쓰는 일에 제자리걸음 중이다. 사람의 경험은 한정되고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는 소재는 주로 나의 경험에 머문다. 책과 TV, 여행이나 만남 등에서 늘 소재 찾는 레이더를 돌리고 있지만 떠오르는 건 거기서 거기다.
소재를 열심히 찾다가 '이거 좀 써 볼까?' 싶은 걸 발견한다. 대략적인 스토리보드를 작성하고 인터넷 서점 검색을 해 본다. 혹시나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와 중복되면 안 되니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더니 벌써 누가 써 버렸다. 그것도 내가 생각지도 못한 멋진 상상력으로.
그랬다. 이미 세상에서 다뤄지지 않은 이야기는 없다. 게다가 내가 생각해내는 건 특별하지도 기발하지도 않았다. 매달 참석하는 그림책 쓰는 합평 모임에서도 '어딘가 부족하다, 예상되는 이야기'라는 의견을 주로 듣고 있다.
그러다 보니 빈약한 상상력을 메워줄 대단한 사건을 찾아 헤맸다. 전쟁, 재난처럼 확실한 메시지가 있는 것들을 쫓게 되었다. 쓰고 싶은 것보다 써야 할 것 같은 이야기를 쓰려고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설교적이고 뻔하고 스스로도 재미가 없다. 쓰는 나도 재밌게 쓰지 못하는데, 읽는 사람이 재미있게 읽을 리가 없다.
피악존카의 타란텔라를 치는 동안, 줄곧 그림책 쓰는 일을 생각했다. 그의 악보는 구성이 복잡하지 않았다. 반복되며 귀에 남는 구절이 다양한 변주를 통해 곡에 통일성과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일정 수준의 아마추어 연주자들, 또는 어린 학생들이 즐겁게 칠 수 있으면서도 난이도 이상으로 아름다운 효과를 느낄 수 있게 곡을 썼다.
새롭고, 복잡한 것, 독특한 것만이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주는 게 아니라는 걸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건 아닌지. 기발해서 무릎을 '탁' 치는 거대한 상상이 아니라도, 이미 수없이 반복된 주제라도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조금 더 아름답게, 읽기 쉽고 재밌게 써 보려고 해도 좋지 않았을까.
반드시 어렵고 모든 부분에서 새로워야 하며, 거창한 무엇일 필요는 없었다. 라디오 속 사연, 독자의 생활형 에세이를 싣는 잡지 글, 그리고 <오마이뉴스>의 사는 이야기에서도 유명한 작가의 거대한 상상력 못지않은 재미, 감동을 얻는다. 진짜 삶에서 뽑아져 나온 진실성과 고유성은 터지는 웃음과 찡한 공감, 생각의 전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책을 쓰는 일에서만 그럴까? 어떤 분야에서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거나 설득하기 위해서 거창하고 대단한 것만 제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가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고, 잘 알고 있는 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잘 전달한다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작년, 대학원을 다니면서 경영사례 연구 수업에서 TED 강연을 벤치마킹하여 발표를 한 적이 있었다. 다양한 연령대, 직종에 종사하는 학생들이 수업을 듣다보니, 서로 간의 노하우를 공유하는 목적이었다. 수십 명의 학생들 중 가장 반응이 뜨거운 다섯 명을 추려 고득점을 주는 방식이었다.
각자 업무나 경험을 주제로 여러 사례가 공유됐다. 그리고 선택된 최종 다섯명은 전문적인 영역의 정보 전달이나 성과 발표가 아니라 발표자만의 시사점을 담아 공감 가는 사례를 발표한 사람들이었다. 마음을 움직이고 설득하는 데는, 따라하기 어려운 성과의 나열보다 이해하기 쉽고 납득할 만한 경험과 표현으로 충분했다.
처음 그림책에 빠졌던 때로 돌아가본다. 기발한 판타지도, 틀을 깨는 형식,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성 있는 그림책도 다 좋았다. 하지만 거듭 펼쳐 읽었던 것은 일상적 소재에서 깊은 공감을 주던 이야기였다. 여러 버전으로 반복되어 온, 보편적 감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식상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다르게 감동적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어려운 무엇 대신, 지금껏 해 왔고 할 수 있는 것을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그 일부를 바꿔보고, 다듬어 가며 작은 변화를 고민하다 보면 내가 하려는 이야기도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고 계속 마음에 머무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나에게도 그것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부산 지역 시민기자들이 일상 속에서 도전하고, 질문하고, 경험하는 일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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