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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주부는 어쩌다 라덕연에 휴대폰을 넘겼나

'지인'에 '핸드폰' 넘긴 대가, 1억7600만원의 빚으로 돌아왔다

등록 2023.05.28 18:44수정 2023.05.28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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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좌 잔고 -6000만원"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아침. 버릇처럼 '어카운트 인포'라는 앱에 접속한 박정은(가명)씨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하루 전날까지만 해도 1억5000만원 넘는 돈이 담겨 있던 계좌에 '마이너스'가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달 24일의 일이다.

초조해진 박씨는 앱에서 나왔다 들어가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기계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닐까, 핸드폰 전원을 꺼보기도 했다. 하지만 잔고는 처음 찍힌 자리에서 요지부동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박씨에게 투자를 권유했던 김소연(가명)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300억원을 갖고 계세요. 그걸로 어떻든 우리 원금을 회복시켜줄 거예요."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렸지만 바로 다음 날 박씨의 계좌엔 '-1억2000만원'이라는 글자가 찍혔다. 하루아침에 손실액이 6000만 원 불어난 것이다. 박씨는 다급해진 마음에 이번엔 증권사에 전화를 걸었다.

"큰일나셨어요. 회사에서 반대매매를 진행하고 있어요.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집에 딱지가 붙을 수도 있어요. 고객님은 신용불량자가 되시는 거고요. 그러기 위해선 계좌 비밀번호가 필요해요. 내일 바로 회사로 오셔야 돼요."

하지만 박씨는 자신의 이름으로 발급된 계좌번호도, 비밀번호도 알지 못했다. 투자금을 맡긴 뒤 김씨가 박씨 명의 계좌를 열고 직접 비밀번호까지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굳게 믿었던 김씨는 며칠 뒤 집 앞 소화전에 박씨 명의로 개통했던 스마트폰과 계좌 비밀번호가 적힌 쪽지를 두는 것으로 '마지막 도리'를 다했다. 곧 김씨와의 연락도 끊어졌다.


다급해진 박씨는 증권사로 향했다. 대책 마련을 위해 버둥대는 새 박씨의 손실은 원금을 포함 2억 7600만원으로 불어났다.

평범한 주부는 어떻게 '라덕연 일당'의 피해자가 됐나


국내 증시에 상장된 8개 종목의 주가가 지난달 4월 24일부터 4일 연속 폭락해 투자자당 투자자에 수억원대 손실을 일으킨 '소시에테제네랄(SG)증권발 주가폭락 사태'의 한 피해자의 이야기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19일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법무법인 원앤파트너스 사무실에서 그와 만났다.

그는 연예인도 전문직도 아니었다. 평범한 70대 가정주부였다. 연예인이나 의사 등 고소득자들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큰 돈을 벌려고 욕심부리다 뒤통수를 맞은 것 아니냐는 세간의 인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이번 사태를 일으킨 원흉으로 꼽히는 차익결제거래(CFD)와도 관련이 없었다. 주가 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라덕연 일당'은 적은 투자금으로도 주가가 부풀어오르도록, 투자자 계좌를 활용해 문제의 8개 종목을 파생상품인 CFD로 투자했다. CFD를 활용하기 위해선 일정 소득요건을 갖춘 '개인 전문투자자'여야 했다. 투자금이 노후자금으로 모은 1억원이었던 박씨에겐 해당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의 손실이 커진 건 증권회사가 증거금을 받고 주식을 매매할 수 있게 돈을 빌려주는 '신용융자'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씨는 본인이 투자한 1억원을 넘어 신용융자까지 투자에 동원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애초에 본인 명의로 된 증권사 계좌가 새로 개설됐단 사실도, 그 계좌로 어떤 투자가 이뤄졌는지도 알지 못했다.

박씨가 알 수 있었던 건 단 하나, 잔고의 총액뿐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휴대전화.
휴대전화. Pixabay
 
"아무 것도 몰랐다"는 피해자

모든 원흉은 휴대폰이었다. 당초 책임지고 박씨 자금을 관리해주겠다던 김씨는 '투자의 준비물' 격으로 신분증 사본과 그의 명의로 된 휴대폰을 요구했다. 어디선가 스마트폰 공기계를 마련해 온 것도 김씨였다. 박씨는 의심 없이 김씨가 마련해 온 휴대폰을 개통하겠다는 내용의 신청서를 작성했다.

박씨 명의의 신분증과 스마트폰. 단 두 개로, 김씨는 높게 세워져 있던 모든 금융 절차의 허들을 가볍게 통과했다. 이후 김씨는 스마트폰 비대면 본인인증을 악용, 박씨 명의로 NH투자증권의 계좌를 개설해 신용융자를 받아 투자를 감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기 계좌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김씨는 사건이 터진 뒤 인터넷은행의 '내 명의 계좌 찾기 서비스'를 통해 사기 당한 계좌를 알아낼 수 있었다.  
 
"소연이가 내 돈을 어떻게 투자하는지 몰랐어요. 빚을 지고 투자를 하는진 더더욱 몰랐죠. 카카오뱅크를 통해 내 계좌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조회할 수 있었는데, 그 중에 ' ○○종합매매'라는 게 나왔어요.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어느 증권사의 상품인지 알게됐죠."

기자에게 김씨로부터의 피해 사실을 털어놓는 순간에도, 박씨는 내내 김씨의 이름을 불렀다. 딸의 오랜 친구였던 김씨는 박씨에게도 딸 같은 존재였다. 박씨가 투자를 결정한 그날도 박씨는 김씨에게 저녁을 대접했다.
 
"소연이는 호안(주가 조작 의혹의 핵심인물로 지목된 라덕연이 대표로 있던 미등록 투자자문업체) 직원이었어요. 딸한테 몇 번이나 투자를 권유했더라고요. 투자를 하면 매달 최소 10% 이상 수익이 난다고요. 처음엔 나도 의심했죠. 그런데 내 딸이 권유하니까. 딸은 외국에 살기도 하고 해서 내가 대신 투자한 거예요"
 
'높은 수익률'은 박씨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놨다. 투자를 시작한 후 거짓말처럼 매일 잔고가 불어났다. 무럭무럭 자라나던 돈은 3개월이 흐를 무렵 두 배가 됐다. 수익금 1억을 정산하기로 결정했다. 김씨에게 특정 계좌에 5000만원을 송금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알고 보니 라덕연 일당이 보유하고 있던 콘텐츠 회사였다. 그렇게 박씨 계좌엔 1억5000만 원이라는 금액이 찍혔다.

하지만 두 달 뒤 모든 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평소 믿음직한 지인에게 본인 명의 휴대폰을 개통해준 대가는 참혹했다. 박씨의 노후는 길을 잃었다. 알뜰살뜰 모아뒀던 노후자금은 하루 아침에 날아갔고, 박씨는 늘그막에 1억 7600만원의 빚까지 떠안게 됐다. 얼마 전엔 4월 한 달 신용융자를 사용한 이자를 내라며 증권사에서 보낸 250만원짜리 청구서까지 받아들었다.
 
"난 돈이 많아서 투자한 게 아니에요. 당연히 주가조작이라는 걸 알고 한 것도 아니고요. 내가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것도 기사를 보고나서야 알았어요. 그저 너무 억울하고 기가 막혀요. 이제 난 어떡하죠?"
#라덕연 #SG사태 #차익결제거래 #신용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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