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니하 건너편에서 바라본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옛 터, 포도원과 논 너머 산기슭에 교사가 있었고 연병장은 논과 포도원으로 변했다고 함,합니하 건너편에서 바라본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옛 터, 포도원과 논 너머 산기슭에 교사가 있었고 연병장은 논과 포도원으로 변했다고 함,
박도
신흥무관학교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유능한 독립군관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군사학술교련에 중점을 두었다. 중등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본과와 무관훈련을 시키는 군사과로 나뉘었지만, 본과에서도 군사교련에 비중을 두고 학생을 선발할 때 반드시 건장한 자를 뽑았다. 신흥무관학교는 학생들에게 군사교련을 시키기 위해 교관으로 대한제국 무관학교 교관 출신인 이세영·이관직·이장녕·김창환 등을 초빙하였다.
신흥무관학교의 학과는 주로 보기포공치(步騎砲工輜)의 각 조전(操典)과 내무령(內務令), 측도학, 축성학, 육군형법, 육군징벌령, 위수복무령, 구급의료, 편제학, 훈련교범, 총검술, 유술(柔術), 격검(擊劍) 전술전략 등에 중점을 두었다. (주석 5)
군사교련의 실시에는 비용 관계로 어려움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군사훈련을 하면서 장총이나 권총·기관총·대포·탄약 등 병기가 없어서 이론교육밖에 할 수가 없었고, 역시 경비 때문에 말을 구하기 어려워 기마훈련을 하기 어려웠다. 그 대신 정신교육과 신체 단련에 집중하고 각종 훈련을 강화시켰다. 일본의 최근 군사교련 교재나 각종 병서를 입수하여 교재로 활용하였다.
학생들은 수업료 등 일체의 학비를 내지 않았다. 숙식도 교내에서 공동으로 하였다. 이상룡·이석영 일가와 유지들이 염출한 기금으로 운영하고, 동포 여성들이 모두 나와서 학생들의 식사준비를 맡았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증언이다.
우당장은 학교 간역(幹役)도 하시며 학교 이름을 '신흥무관학교'라 하였다. 발기인은 우당 이회영씨, 석오 이동녕씨, 해관 이관직씨, 이상룡씨, 윤기섭씨, 교주는 이석영씨, 교장은 이상룡씨였다. 이분은 경상도 유림단 대표로 오신 분이고, 이장녕씨·이관직씨·김창환씨 세 분은 고종황제 당시에 무관학교의 특별 우등생으로 승급을 최고로 하던 분이다. 만주에 와서 체조 선생으로 근무하는데, 대소한 추위에도 새벽 3시만 되면 훈령을 내려 만주서 제일 큰 산을 한시간에 돌고 오는지라, 세 분 선생을 '범 같은 선생'이라 하더라. 시당(時堂) 여준 선생은 합방전에 오산중학교 선생으로 근무 중에 애국지사로 우당장과 연락을 하시더니, 임자년(1912)에 합니하로 오셔서 학교 선생으로 지내셨다. 그분 백씨 봉함장은 가족까지 솔권하여 설산(說産)하고 지내셨다. 이상룡씨가 4, 5년 있다가 지방학교로 가신 후 여준씨가 교장으로 근무하는 것을 보았다. (주석 6)
이상룡은 교장으로 재임할 때는 물론 퇴임 후에도 자신이 지은 <대동역사(大東歷史)>를 교재로 우리 역사를 강의하였다.
"1913년 이상룡은 만주지역 독립운동계만이 아니라 그곳으로 이주해 오는 동료들을 정신적으로 무장시키고자 역사서를 저술했는네, 이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교재로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인들의 압박을 견디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氣)'를 살려야 했다. 그는 <대동역사>를 편찬하였는데 이는 민족교육의 지침을 마련한 것이었다." (주석 7)
생도들 자신이 강설기를 이용하여 학교 건너편 낙천동이란 산언덕에서 허리에 차는 쌓인 눈을 헤치며 땔감을 끌어내리고 등으로 이를 날랐다. 매년 월동준비는 학생들의 자력으로 해결하였다. (주석 8)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교관이나 학생들은 희망에 부풀었고 열심히 공부하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면서 만주는 물론 국내에까지 널리 알려져 입학하려고 찾아온 젊은이들이 많았다.
신흥무관학교는 본과와 특별과가 있었다. 본과는 4년제 중학 과정이고, 특별과는 6개월과 3개월 속성의 무관 양성과정이었다. 무관학교 생도들의 하루 일과는 이 학교 졸업생으로 교관이었던 원병상의 수기에서 생생하게 보여준다.
모든 생도들은 새벽 6시 기상나팔 소리에 따라 3분 이내에 복장을 갖추고 검사장에 뛰어가 인원점검을 받은 후 보건체조를 하였다. 눈바람이 살을 도리는 듯한 혹한에도 윤기섭 교감이 초모자를 쓰고 홑옷을 입고 나와서 점검을 하고 체조를 시켰다. 자그마하지만 다부진 인물인 여준 교장은 겨울에도 털모자를 쓰지 않은 채 생도들의 체조 광경을 지켜보았고, 벌도 매서웠다고 한다. 활기찬 목소리, 늠름한 기상에 뜨거운 정성이 담겨 있었다.
체조 후 청소와 세면을 마치면 각 내무반별로 나팔소리에 맞춰 식탁에 둘러앉았다. 주식은 가축 사료나 다름없는, 윤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좁쌀이었다. 부식은 콩기름에 절인 콩장 한 가지 뿐이었다. 학생들이 얼마나 기름기 없는 음식을 먹었는지 한 일화로 짐작할 수 있다. 1912년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낙성식 때 이석영이 큼직한 돼지고기를 기증하자 이를 정신없이 먹은 생도들은 배탈이나 여러 날 고생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턱없이 부족한 식사와 의복에도 불구하고, 교직원은 단의(單衣)와 초모를 쓰고 교육을 시켰고, 학생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훈련에 열중했다. (주석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