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진 평범함'에 감사하는 순간

등록 2023.05.28 11:35수정 2023.05.2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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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조금 있으면 아들의 전화가 올 것이다. 처음 한동안은 혼자 미국으로 보내고 걱정과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린 왕자>에서 '4시에 오시면 저는 3시부터 행복해져요'라는 말처럼 7시부터 신랑 아침 식사를 차리고, 청소 대충 해놓고 행복하게 폰 앞에서 대기하곤 했다. 이제는 그 들뜬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서 가라앉아 평범한 일상이 돼버렸지만 여전히 하루 중 제일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평범함에 감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별 일 없지? 아픈 데 없지?"
"응. 굿"


무뎌진 대화지만, 그 평범함이 감사하다. 집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20층서 한 번 선다. 순간 신경이 날카로와진다. '잘됐다! 오늘은 한번 제대로 얘기해야겠다' 벼르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윗집 할머니와 아이 둘이 빤히 쳐다본다. 순간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인사를 시킨다.

아이들은 어디에서 배웠는지 아주 공손하게 손을 배꼽보다 높이 올리더니 "안녕하떼요" 하고 크게 고개를 발끝이 닿을 정도로 숙인다. 나는 순간 너무 귀여워서 "어이구 많이 컸네. 어린이 집 가니?"하고 말을 건넸다.

말을 붙이지 말았어야 했다. 이 개구쟁이 둘이 내 반응이 너무 좋았는지 경쟁적으로 인사를 하기 시작한다. 다른 층에 사람이 탔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나한테 계속 절을 해댄다. 우리 모두 웃으니까 더 신났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도 안 가고 뒤돌아서 계속 인사를 한다.

도저히 말 할 타이밍이 나오지 않는다. 윗집 할머니는 미안한 눈빛을 하고 얼른 애들을 몰고 밖으로 나 간다. 몇 년 전부터 조용한 우리 집에 어느 주말 저녁부터 천장에서 조그맣게 콩콩거리는 소리가 났다. 거실 한 쪽 끝에서 저쪽까지 콩콩, 그리고 되돌이표. 세월이 흐르면서 소리가 하나 더 늘어 화음을 맞춰대기 시작했다.


"쿵, 퍽, 쿵 퍽퍽, 쿵쿵퍽퍽, 쿵퍽쿵퍽, 퍽퍽꽝꽝 우자창 퍽 꽝 우장장창"

어젯밤, 신랑과 나는 오랜만에 거실에서 서스펜스영화를 보고 있었다. 클라이 막스에 조용한 음악이 깔리고 무언가 나올 타이밍에 쿵쿵 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점 커지고 결국 영화는 중도에서 포기했다. 올라가서 확실하게 이야기하라고 신랑에게 미루다 가벼운 말싸움까지 했다. 신랑은 신랑대로 나는 나대로 한 두 번 경비실에 얘기를 했었다.

그러나 그때뿐 10분만 지나면 다시 난리가 난다. 신랑은 주말에 자느라 자기는 잘 못 느끼겠다며 은근슬쩍 발을 뺀다. 나중에 경비실에 얘기하겠다고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부글 거리는 마음을 다 잡고 있는데 신랑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다. 애들이 이번에는 방에서 뛰는 모양이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를 했었야 했는데 아이들이 인사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래, 조금 더 참아보자하고 차를 몰고 화실로 왔다.

화실 한 켠에 얼마 전 밑칠을 해 둔 목련을 그린 캔버스를 꺼내든다. 이른 봄 화실 근처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화실 친구가 근처에 목련이 너무나 탐스럽게 피어있는 집이 있다며 금방 떨어지니 사진이나 찍어두자는 친구 말에 그 집을 찾아갔다.

빨간 벽돌 옆에 자색 목련이 처음에는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았는데, 두 번 물감을 올려놓으니 그 나름 느낌이 있었다. 현대적 느낌으로 풀어내면 나름 작품하나 나올 것도 같다. 붓 대신 나이프를 들었다. 자목련의 우아한 색을 그대로 뽑아내고 싶은 욕심에 두껍게 나이프를 사용했는데 잘 못 생각한 거 같다. 이제 올라온 여리디 여린 잎을 두껍게 나이프로 칠 할 생각을 하다니. 한 숨을 쉬며 사진을 보며 다른 방법을 찾아 본다. 목련 사이에 연두빛 새 순들이 곳곳에 눈에 뜨인다. 연한 녹색잎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채 겉은 자색이고 안은 우유빛인 목련과 함께 햇빛에 빛나고 있다. 빛이 센 양지 쪽에 어린 꽃순은 연두빛마저 반사시켜 하얗다.

서로 다투듯 피어 있는 새순들을 보고 있노라니 아침에 아이들이 경쟁하듯 한 배꼽 인사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애들을 맡기기 전 엘리베이터에서 윗집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라고도 할 수 없을 거 같다. 왜냐면 나하고 나이차가 많아야 5살이나 6살 차이 밖에 안 났으니까. 그래도 일단 아이들의 할머니이니 할머니란 호칭을 사용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울고 있었던 듯 싶다. 내가 타니까 눈믈을 훔치고 민망해서인지 말을 건넸다.
  
"아이들 다 키우고 쉴 만하니까 이제 손주 봐 달라고 하네요. 이제 우리 아저씨도 은퇴해서 같이 여행도 다니고... 취미생활도 하고 싶었는데."

아마도 내가 캔버스 몇 개를 갖고 타는 것을 봤나 보다.

"아휴! 그래도 제 옆에 다른 언니들은 안 봐준다 하면서도 다 봐주더라고요. 이제는 손주 하루만 안 봐도 보고 싶어 전화한다던데요."
"네, 아이들 보면 못 봐주겠다 말도 못하겠어요. 어찌나 예쁜지."


다행히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이야기 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는지 아님 울고 있었던 게 머쓱해서인지 활짝 웃으며 내리신다.

그렇기에 더더욱 위에서 애들 뛰는 소리가 나고 뭐가 깨지는 소리가 나도 말을 못했다. 할머니가 애 보는데 힘들겠네라고 생가하면서. 그런 아이들이 벌써 커서 병아리 마냥 노란색 모자에, 노란색 옷을 쓰고 유치원에 가는 걸 보니 새삼 세월이 빨리도 가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 근데 오늘 이제보니 주말이 아닌데, 아이 엄마가 어디가 아픈가?' 또 오지랖 넓은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웃겨 애써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본다.

이미 나이프로 한 그림은 붓으로 할 수가 없어 다른 방법이 생각이 날 때 까지 그림을 일단 보류 해야겠다. 나무 줄기의 칙칙한 밤색 대신 새순을 품은 줄기답게 진 분홍으로 물들이고 새로 나온 잎은 채도를 더 높게 해 볼까. 새로운 봄에 어울리는 생생함이 더해져야 할 것 같은데. 물감을 흩뿌려 볼까? 주욱 물감 덩어리를 던져볼까? 이런 저런 생각하는데 전화가 온다. 신랑이다.

어제 윗집 때문에 잠시 말다툼한게 미안했는지 저녁에 술 한잔 같이 하자 한다. 이미 잊어버려서 생각도 안하고 있는데 일도 바쁜데 나까지 챙겨줘서 살짝 고마운 생각이 든다. 둘이 스시에 사케를 나눠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하다 윗 집 아이들이 생각이 났다.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니 둘이 다투어 서로 이해해 주자 의견을 내놓는다. 심지어 토요일 저녁은 무조건 외식하고 늦게 들어오자한다.

기분 좋게 결론짓고 식당을 나가니 해가 많이 길어졌는지 이제야 가로수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는 아련한 봄밤, 술기운 탓인지 저물어 가는 석양과 가로수의 흐릿한 불빛이 오늘 따라 더 아름답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의 마지막 구절이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누군가가 첫사랑의 두근거리는 감정으로 평생을 살면 심장이 터져 버릴거라 한다. 아무리 좋은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식어야 하고 일상으로 들어와야한다. 오늘 저녁같은 포근한 일상으로. 조금은 더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아이들의 쿵쿵거리는 소리도 아들의 전화처럼 주말에 찾아오는 평범한 일상으로 무뎌질 거라고 마음을 다 잡아본다.
#평범한일상 #층간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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