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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2학년에게 축구로 대판 깨진 날

"귀여워"라는 말로 시작한 경기였는데.... 많은 걸 보고 배우다

등록 2023.05.30 21:34수정 2023.05.31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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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단 한 번도 공을 만져본 일 없던 여성이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축구하면서 접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함께하면 이렇게 따뜻하고 재밌다고, 당신도 같이 하자고요. [기자말]
대학 시절, 매일 아침이면 농구공을 들고 코트로 달려 나가던 남자 선배가 하나 있었다. 농구를 할 줄은 몰라도 3대 3 또는 5대 5로 이루어지는 경기라는 상식쯤은 가지고 있던 나는 그에게 "혼자 거기 가서 뭐하냐"고 물었다. 그는 말했다.

"가면 나처럼 혼자 온 사람들이 있어."


당시에는 난생 처음 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함께 몸을 부대끼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짧지만 친밀한 시간을 보낸 이후로는 상대와 그 어떤 유대관계를 형성하지 않는 것 또한 의아했다. 2시간만 함께하는 관계라니. 친구라기엔 너무 멀고 이방인이라기엔 이미 안면을 튼 사이. 이런 관계를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나.

지금은 잠시라도 함께한다면 그 또한 소중한 인연임을 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즐거웠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빈 풋살장에서 혼자 공을 차고 있는 내게 슬금슬금 다가와 "같이 게임하실래요?"라고 묻는 이들을 몇 번 만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남성이었으나(혼자 공 차러 온 여성은 지금껏 딱 2명 봤다), 연령대는 초등학교 2학년생부터 4050 중년까지 다양했다. 그때마다 나는 기꺼이 "제가 껴도 돼요?"라는 말과 함께 해맑게 웃었다. 우리는 경기를 함께했고, 헤어질 때 "다음에 또 봬요"라고 인사하지만 아마도 다음은 없으리라.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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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살공과 사다리. 그 뒤에 몸을 풀고 있는 축구 친구들. ⓒ 오정훈


생판 남인 이와 처음으로 대결을 벌인 곳은 실내 풋살장이었다. 친한 축구 친구들과 토요일 오전 풋살장을 빌려 함께 공을 차고 있었다. 다음 타임이 초등학생 대상 축구교실이었는데, 그날따라 해당 수업 학생들이 일찍 도착해 구장 바깥에 옹기종기 자리 잡고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그 수업 코치님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저희 애들이랑 게임 한번 하실래요?"


나이를 물어보니 제일 어린 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키는 내 반밖에 안 되고, 4호짜리 풋살공이 그 친구들 머리보다 클 것 같았다. 어른이 아이들에게 이래도 되나? 혹시라도 다치게 하면 어떻게 보상하지? 쭈뼛거리는 우리에게 축구교실 코치는 "배우는 게 많으실 거예요"라는 말과 함께 시합을 강행했다. 그렇게 성인 넷과 초등학생 10여 명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 코치의 말이 맞았다. 아이들의 키가 작다 보니 속도도 느리고 체력이나 몸싸움도 밀렸지만 볼 컨트롤 능력과 상대 친구를 보고 패스 길을 찾는 시야, 기회가 왔을 때 보이는 침착함 등은 나보다 나았다. 내 경기 영상을 본 축구 친구는 말했다.

"이건 뭐... 그냥 지은님이 몸으로 밀어붙여 겨우 대등하게 만든 것 같은데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아이고, 귀여워"라는 말과 함께 시작한 우리는 막판에는 아이들의 몸놀림에 놀아나느라 체력을 다 소진해 기진맥진하고 있었다.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할 이유가 없는데,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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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경기 중인 축구 친구들. ⓒ 이지은


어린이는 미숙하고 불완전? 그건 편견이다

가끔 유튜브 숏츠나 인스타그램 릴스(10초 가량 되는 동영상)에 '잼민이(초등학생들을 가리키는 속어)에게 OOO 가르쳐주기'라는 이름의 영상들이 뜬다. 미숙한 이를 초등학생으로 상정하고, 그의 질문에 적당한 대답을 해주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영상은 보통 남자아이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형, OOO 하는 법 알려주세요!" 곧이어 형으로 상정되는 성인 남성의 목소리가 등장하며 각종 스킬들을 가르친다.

이때 꼭 그 '잼민이'는 맥락 없는 말로 남성을 자극하고, 그때마다 '형'은 어린아이를 향한 농담 섞인 무시나 비하 발언으로 상대의 말을 가볍게 이겨버린다. 이 패턴이 늘 등장하는 것 보면 소비자들에게 꽤 잘 먹히는 농담인가 보다.

반면에 그 기술을 익히기 위해 해당 콘텐츠를 들여다보는 나는 그때마다 그 아이가 되어 함께 무시당하는 기분이 든다. 내가 그 '잼민이'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연령대는 아니지만 그가 말하는 '초보자'에 속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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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 연습을 위해 일렬로 선 축구 친구들. ⓒ 이지은


많은 이들이 자신이 초보임을 가리킬 때 뒤에 '-린이'를 붙인다. 축구 초보는 '축린이', 골프 초보는 '골린이', 주식 초보는 '주린이', 요리 초보는 '요린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입문자를 어린이에 빗대어 표현한다. 어린이는 미숙하고 불완전하다는 편견이 깔린 이 표현을 볼 때마다 나는 함께 공을 찼던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아이들이 진지하게 스포츠에 임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그들 앞에서 '잼민이' 또는 '축린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조금 일찍 태어나고 더 익숙하다는 사실이 왕관이 될 수 없듯이, 처음 접하고 어리다는 게 무시당할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나이와 성별을 떠나 그저 축구라는 스포츠 아래 함께 공을 차는 사이일 뿐이니까.
#축구 #린이 #어린이 #여자축구 #생활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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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노동자. 두 권의 책을 낸 작가. 여성 아마추어 풋살선수. 나이 든 고양이 웅이와 함께 살고 있으며, 풋살 신동이 되고 싶습니다. <편집자의 마음>, <들어 봐, 우릴 위해 만든 노래야> 두 권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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